‘동화’란 아동문학의 한 부문으로 동심을 기조로 하여 지은 정서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이 많아 어린이들에게 유익하여 부모가 흔히 권장하여 읽게 하는 장르라고 하겠다. 그래서 동화의 대상은 재론할 여지없이 어린이의 마음과 그 세계를 소재로 하여 어린이 정서에 맞게 쓰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어른을 위한 동화’가 나와 있다. 시인 정호승의 ‘모닥불’이 그것이다. 동화는 동화인데 어른을 위한 동화란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행여 진부하고 유치한 애들 이야기는 아닐까, 그래서 시간만 버리는 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망설이다가 5월은 어린이 달이기도 하니 한번 읽고 어린이의 세계로 빠져보자 하는 마음에서 책을 폈다.

읽어가면서 마음이 맑아지고 순수해 졌다. 단순한 마음, 거짓 없는 마음, 조건 없이 그냥 믿고 의지하는 어린애 마음을 갖고 싶어졌다. 성서에도 보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는 말씀이 있다.

모닥불의 주인공은 ‘뗏목’이다. 뗏목의 생활은 희생하면서 늘 기쁨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 누가 와서 타고 강을 건너면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어 한다. 그저 보다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강을 건너기를 바라고 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는 소년을 태운 적이 있고, 부모님 몰래 애인을 만나러 가는 소년을 태운 적이 있고, 어떤 때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태워본 적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잿가루가 된 한 젊은이의 유해를 태워 강물에 뿌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가장 태우고 싶어하는 이는 강 아랫마을에 사는 한 소녀이다. 소녀는 뗏목을 만들어 강가에 매어둔 아저씨의 따님으로 이름은 연이다. 강 건너 윗마을 학교로 소녀가 입학을 하게 되자 아저씨는 어느 날 소나무 몇 그루를 베어 뗏목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뗏목은 그 소녀를 태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 할 수 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내 소녀를 실어 날랐다. 소녀가 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시집을 갈 때도 태워다 주었다. 시집을 간 뒤 새색시가 되어 어느 해인가 첫 아이를 안고 왔을 때도 태워다 주었는데 그 뒤로 연이는 아직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 왜 아니올까? 시집살이가 고달파 그럴까. 행여 몹쓸 병에 걸려 그런 건 아닐까.

소녀가 오래 보이지 않자 뗏목에게는 근심이 생겼다. 그리움이 생겼다. 누구의 일생이든 그 속에 하나씩의 기다림이 숨어 있는 것을 이제 뗏목은 알았다. 뗏목은 오늘 소녀를 몹시 보고 싶어 한다. 어떤 날은 어쩌면 그녀가 나타날 것 같아 가슴이 두근 거린다. 그런데 소녀는 영영 오지 않는다. 세월은 흘러 겨울이 오고 강 언덕에 버려진 뗏목은 소녀가 보고 싶어 간혹 고개를 내밀고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으나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 한가운데에다 구멍을 뚫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뗏목을 무자비하게 뜯어다가 모닥불을 피운다. 더 이상 소녀를 보지 못하고 그렇게 모닥불이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면서 뗏목은 말한다. “어디선가 겨울 강가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보시면 소녀를 기다리는 내 기다림이 타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하며 끝이 난다.

모닥불을 쬐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을 감동시키는 모터 소리가 들린다. 아! 칠십이 훌쩍 넘어 읽은 동화가 좋았다. 어디 또 동화가 없나, 어른을 위한 동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