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은 2년 전만 해도 나의 모교였던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의 풋볼팀 코치였던 빌 스튜어트의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 소식이었다. 그는 학교 풋볼팀이 힘들 때 그래도 잘 정비해서 제법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지만, 결국 더 강한 팀을 만들기를 염원했던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작년에 해임 당했었다. 그의 해임 소식을 듣고 약간의 동정심을 가졌던 나는 이제 겨우 58세밖에 안된 그의 갑작스런 부음소식에 무척 놀랐던 것이다. 인기와 물질 명예 등의 허무함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한편, 빌의 사망소식이 아직 식기도 전인 하루인가 이틀 후에,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의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다. 빌의 경우와 같이 주위 사람들이 전혀 생각 조차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 진 후, 응급실로 들어간 그는 결국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결국 죽음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제 겨우 결혼 한 지 4개월 여 밖에 안 된 한창 신혼의 재미에 푹 빠져있는 상황이었고, 아이까지 가졌다는 소식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 학생이나 남편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기에 심한 충격으로는 다가오지 않았지만, 살아남은 학생과 하나님 품으로 간 남편, 그리고 엄마의 배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을 잃은 학생과 가족들을 위로하고자 모였던 금요예배에서 찬양을 부르면서, 기도를 인도하면서, 예배가 끝나 그 여학생과 죽은 남편의 동생을 위로하면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내내 목사이자 목회상담가로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질문하였다. “희망과 치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과연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살고 있는 젊은 부부에게 이 시련은 너무도 가혹한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그토록 추하고 독한 죄를 짓고서도 뻔뻔스럽게 찬송가와 성경책 들고 교회에 나가 기름으로 번지르르한 얼굴을 내미는 철면피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이 세상 살아갈만한 희망과 소망을 키워가야 하는 젊은이에게 이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지요? 당신의 사랑과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들, 그리고 이어지는다른 질문들을 수도 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나는 절망하고 있었다. 남편과 형과 아들을 잃은 가족들의 비통에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나는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라도 말할 수 밖에 없는 희망과 치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까? 일을 당한 자가 그 여학생이 아니라, 나라면 과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까? 솔직히 자신 없다. 물론 결국 받아들이겠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건은 당사자의 삶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날,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목회상담이란 이래서 더욱 깊이 들어갈 수록, 인생의 이야기들을 더 많이 듣고 경험할수록 힘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침 튀겨가며 강의시간에 강조했던 두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애매모호한 하나님”이었다.

과연 그 어떤 유한한 인간이 (목사들을 포함한) 무한하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호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 역사가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신학자들의 이론이나 목사들이 설파했던 말들은 그저 하나님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삶이 힘들어 지치고 눈물 나도록 서럽고 슬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데, 마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더 깊은 수렁으로 미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힘써 하나님 자신을 알려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힘겨운 일을 당한 내담자들을 만나며 상담할 때면 희망과 용기를 주곤 했는데, 이번 주는 참 나를 힘들게 한다.

장보철 목사, 워싱턴침례대학교 기독교상담학 전임교수/ bcchang@wbcs.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