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 및 특성 불안 측정 도구”(State-Trait Anxiety Inventory)는 보통은 줄여서 STAI라고 하며, 불안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해서 스필버거(Charles Spielberger, Ph.D.) 박사를 비롯한 일단의 동료 학자들에 의해서 고안되었습니다. 이들은 불안의 종류를 상태불안(state anxiety)과 특성불안(trait anxiety)으로 나누었습니다.
스필버거 박사에 의하면(1983), 상태불안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처했을 때 거기에 반응해서 나타나는 불안으로 상황적이고 임시적인 불안입니다. 예를 들면, 중요한 시험이나 인터뷰를 앞두고 마음에 안정을 찾기가 힘들거나, 직장에서 감원의 여파가 닥쳐서 비록 아직 해고 통보는 받지 않았더라도 ‘정말로 해고되면 어떻게 하지?’라고 상상하면서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즉, 상태불안의 점수가 높다는 것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일시적으로 불안해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그 점수가 매우 높으면 “급성 불안”(Acute Anxiety)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Maxmen & Ward, 1995).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 17:22-23)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 근심하였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루페오”(lupeo)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고통, 슬픔, 번민 등으로 인해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 앞장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복이 있도다”로 시작되는 극도의 칭찬을 받았었습니다(마 16:16-19).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극도의 꾸지람도 받았습니다(마 16:23). 그 이유는 예수님께로부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놀란 나머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까지는 전혀 죽으심이나 부활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다가, “이 때로부터” “비로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16:21). 그러니 베드로는 처음 듣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무척 놀랐을 것이며, 당연히 예수님을 붙잡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리게 되었던 것입니다(마 16:22).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자신들의 곁의 떠난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무슨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루 저녁 같이 계시지 않았을 때, 풍랑으로 고난을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마 14:22-33). 심지어는 배에서 잠시 주무시기만 해도,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5)하고 깨워야 할 정도의 극심한 어려움도 겪었었습니다(마 8:23-27). 그런데 죽으신다는 것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별인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죽었다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죽음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의 의미를 아직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큰 불안에 휩싸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주님께서 왜 그와 같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마 16:21)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들었으니, 그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언가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없어져 버린다면, 당연히 ‘우리들은 뭐지? 어떻게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그런 일은 전혀 예상했거나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16장에서 그런 대화가 있은 지 6일 후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만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도록 변화하셨습니다(마 17:1-2). 그런데 예수님 없이 산 밑에 남아있던 제자들에게는 다시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어떤 한 아이가 귀신에 붙들려 있었는데,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는 꾸지람을 받게 되었습니다(마 17:20). 예수님의 부재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슬픔,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심히 요동하였습니다(마 17:22-23). 이렇게 주어진 상황을 앞에 두고 하는 것이 상태불안입니다.
김재덕 목사는 총신대학교(B.A.)와 연세대학교(B.A.) 및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미국 Liberty University (Lynchburg, VA, www.liberty.edu)에서 목회상담(Pastoral Care and Counseling)을 전공했다(Th.M. & Ph.D.). 현재 Liberty University의 상담학과에서 교수(Assistant Professor)로 재직하고 있다.
스필버거 박사에 의하면(1983), 상태불안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처했을 때 거기에 반응해서 나타나는 불안으로 상황적이고 임시적인 불안입니다. 예를 들면, 중요한 시험이나 인터뷰를 앞두고 마음에 안정을 찾기가 힘들거나, 직장에서 감원의 여파가 닥쳐서 비록 아직 해고 통보는 받지 않았더라도 ‘정말로 해고되면 어떻게 하지?’라고 상상하면서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즉, 상태불안의 점수가 높다는 것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일시적으로 불안해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그 점수가 매우 높으면 “급성 불안”(Acute Anxiety)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Maxmen & Ward, 1995).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 17:22-23)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 근심하였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루페오”(lupeo)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고통, 슬픔, 번민 등으로 인해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 앞장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복이 있도다”로 시작되는 극도의 칭찬을 받았었습니다(마 16:16-19).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극도의 꾸지람도 받았습니다(마 16:23). 그 이유는 예수님께로부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놀란 나머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까지는 전혀 죽으심이나 부활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다가, “이 때로부터” “비로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16:21). 그러니 베드로는 처음 듣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무척 놀랐을 것이며, 당연히 예수님을 붙잡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리게 되었던 것입니다(마 16:22).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자신들의 곁의 떠난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무슨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루 저녁 같이 계시지 않았을 때, 풍랑으로 고난을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마 14:22-33). 심지어는 배에서 잠시 주무시기만 해도,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5)하고 깨워야 할 정도의 극심한 어려움도 겪었었습니다(마 8:23-27). 그런데 죽으신다는 것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별인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죽었다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죽음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의 의미를 아직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큰 불안에 휩싸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주님께서 왜 그와 같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마 16:21)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들었으니, 그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언가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없어져 버린다면, 당연히 ‘우리들은 뭐지? 어떻게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그런 일은 전혀 예상했거나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16장에서 그런 대화가 있은 지 6일 후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만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도록 변화하셨습니다(마 17:1-2). 그런데 예수님 없이 산 밑에 남아있던 제자들에게는 다시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어떤 한 아이가 귀신에 붙들려 있었는데,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는 꾸지람을 받게 되었습니다(마 17:20). 예수님의 부재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슬픔,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심히 요동하였습니다(마 17:22-23). 이렇게 주어진 상황을 앞에 두고 하는 것이 상태불안입니다.
김재덕 목사는 총신대학교(B.A.)와 연세대학교(B.A.) 및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미국 Liberty University (Lynchburg, VA, www.liberty.edu)에서 목회상담(Pastoral Care and Counseling)을 전공했다(Th.M. & Ph.D.). 현재 Liberty University의 상담학과에서 교수(Assistant Professor)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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