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많이 오가는 강남의 한 거리에서 “슈바이처 아세요?”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봉사한 의사’라고 대부분 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장기려를 아세요?” 라고 물으면? 거의 모를 것 같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와 비슷한 인생을 산, 최근까지 우리와 함께 한 분인데도 그의 삶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 우리 교육은 외국 위인만 소개할까?’라는 질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닮기 힘든 엄청난(?) 위인보다, 소소하지만 삶에 따스한 도전을 주는 위인이 좋습니다. 그래서 장기려 박사의 전기가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장기려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자마자 ‘김봉숙’과 결혼하고, 내과 의사인 장인은 사위와 함께 개업하기를 원했기에 장기려는 ‘외과’ 의사가 됩니다. 그리고 평양연합기독병원을 시작으로 의료 사역이 시작되는데,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오면서 ‘복음병원’을 시작했고, 정부의 의료보험제보다 10년 앞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표어: 건강할 때 병자를 돕고, 병에 걸렸을 때 도움을 받자)을 주도합니다. 이러한 모든 활동들은 의대에 입학할 때 서원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대한 실천 모습이었습니다.

돈 없는 환자는 무료로 치료해주고, 병원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자신의 봉급으로 지불하며 철저한 사랑을 실천한 장기려에게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5년간 부산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환자 치료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병원 행정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퇴원을 했어야 할 환자가 그대로 누워있는 것을 봅니다. 어찌된 일인지 알아봤더니 서무과에서 입원비를 내지 않으면 신분증을 내주지 않겠다고 해서 퇴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화를 전혀 내지 않고 살던 장기려는 이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냐?”며 사무실의 책상을 엎었습니다. 그런데 책상 서랍에 반지, 시계, 목걸이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입원비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담보로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환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이익을 챙기는 병원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1940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춘원 이광수가 결핵에 걸려 6개월 동안 경성의전 부속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주치의가 장기려였기에 친분이 생겼습니다. 레지던트인데도 너무나 성실하고 훌륭한 장기려를 보며 이광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천사지?”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천사인가? 말도 안 되네.” 그러자 이광수가 “천사가 아니면 바보지?” 그 후 이광수는 소설 <사랑>을 쓸 때 장기려를 모델로 해서 주인공 안빈을 그려냈습니다.

장기려의 헌신은 진료의 모습만이 아니었습니다. 평양에 있는 산정현교회에서 1948년에 장로로 피택된 그는 1951년 부산에 산정현교회를 재건해서 1981년 은퇴할 때까지 종으로 섬깁니다. 하지만 환자만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1992년에 쓰러집니다. 잠깐 병이 호전되었을 때도 청십자병원에 나가 환자 10여명이라도 돌보려고 했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죽은 후에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죽기 전 1천만원이 통장에 있는 것이 확인되자 그 돈을 간병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죽은 후 묻힐 공원묘지 10평조차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인생을 산 것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린 장기려는 항상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란 말보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묘석에는 아홉 자의 한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199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지만, 그는 세상의 명성이 아닌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으로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이훈 목사(하늘뜻섬김교회 담임) www.servingod.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