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희망과 꿈은 호흡과 같은 것이다. 숨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처럼 희망은 생명의 양식이요, 힘인 것이다. 캄캄한 감옥에서 희망은 작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다. 이 창문이 없는 감옥은 지옥과 같은 곳이다. 희망이 없는 인생은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쉽게 절망하여 포기하면 마음까지 해친다”고 했다. 성경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로마서12;12)라고 했다.

희망, 꿈, 소망을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가 않다. 원래 사람은 작은 일에도 쉽게 절망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법이다. 오늘을 살면서 오늘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차 있다.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감옥의 한 벽에 이런 글이 있었다고 한다. “햇빛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태양을 믿는다. 비록 느끼지 못 하더라도 사랑을 믿는다. 비록 잠잠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런 글을 쓸 때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절망하고, 고독하고, 절규했을까? 결국 그가 얻은 해답은 오직 하나였다. “절망과 포기는 곧 죽음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온전한 육체를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육신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오실 그 구세주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11:5, 개역한글)

호주가 태생인 닉 부이치치( Nicholas James Vujici)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두 팔과 양 다리가 없고, 오직 짧은 다리에 작은 발가락만 가지고 성장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말보다 오히려 그것은 죽음이고, 절망과 같은 것이다. 그가 성장하면서 겪어야 했던 많은 고통과 슬픔, 고독, 자궤감등은 우리의 상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정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I HAVE NEVER MET A BITTER PERSON WHO WAS THANKFUL) 또한 불행하게 살면서 감사하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OR A THANKFUL PERSON WHO WAS BITTER).

인생의 축복과 감사는 일상적인 것이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고상하고, 특별한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절제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다.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긴장감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교만은 자기의 열등감에서 나온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려야 하고,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은 불행을 알리는 신호이다.

한 몸이지만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애비와 브리타니 자매(Abby & Brittany Hensel), 닉 부이치치와 비슷한 장애를 가진 일본인 사노 아미, 그리고 레나 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삶은 어떤 고도(ALTITUDE)에 놓여져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태도(ATTITUDE)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슬프고 불평하는 BITTER의 삶이냐? 아니면 지금 행복을 즐기는 BETTER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면 더욱 더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