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4월 말), 우리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의 기도 제목을 듣고 싶어서(아니 사역하시는 그 모습을 봐야 진심으로 기도가 될 것 같았고, 참된 선교의 마음이 생길 것 같아서) 3일 동안 전국을 운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광양과 여수에 위치한 두 교회를 방문하면서, 계획에 없던 ‘애양원’을 들르게 되었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한 ‘애양원’의 실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멀지 않은 거리라면 당장이라도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너무나 아름답고 영적인 깨달음이 많았던 그곳, 애양원!

그래서 이 책을 더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그때 모습이 하나씩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902년 경남 함안군에서 태어난 손양원 목사님의 본명은 ‘손영준’입니다. 가난한 농사꾼인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손 목사님은 어릴 때부터 새벽기도, 가정예배, 십일조, 주일성수를 가정의 규칙으로 배웠습니다.

손 목사님은 1914년 공립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동방요배를 거부하다 퇴학 위기를 맞기도 했고,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중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합니다. 하지만 1924년(23살)에 19살인 정양순과 결혼하고, 25살 때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며 주기철 목사님을 스승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부산에 나병 환자들 600여 명이 모이는 ‘감만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는데, 처음에는 참 힘들어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병으로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얼굴이 무섭게 변해 있으니 대하기가 힘듭니다. 무섭지 않게 하옵소서.

둘째, 환자들의 살이 썩으니 냄새가 심합니다. 냄새를 못 느끼게 하시옵소서.

셋째, 처음으로 나병 환자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했으니 나병 환자들을 위한 목회로 끝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신실한 마음으로 목회를 하자 성도들이 외지 전도사에 불과한 손양원을 신뢰하고 어느 목회자보다 존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을 시기하는 세력으로 인해 교회를 사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34살의 늦은 나이에 평양신학교를 입학했는데, 1938년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므로 죄가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하지만 손양원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장로교 경남 노회는 그를 순회 전도사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선고합니다. 소수의 정의가 다수의 불의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38살의 젊은 나이에 애양원교회 담임교역자로 부임하게 되는데, 몇 년간 감옥에 있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그는 항상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명예와 신분 상승을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삯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친구이자 가족인 나병 환자들을 위해 끝까지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한 겁니다. 당시 애양원의 1-10호실은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이 지내고 있었고, 11-13호실은 경환자실, 14호실은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이 14호실은 진물과 핏자국, 땀이 엉겨 붙어서 치료를 하려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신문지를 여러 겹으로 깔아야 방바닥에 떨어진 진물들로 인해 미끄러져서 옷이나 피부가 진물범벅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그들의 이마에 얼굴을 대고 기도해 주었고, 간절한 기도에 환자들의 눈물과 썩은 피부가 함께 흘러내릴 때도 있었습니다. 기도 후에는 그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오, 주여! 이들을 사랑하되 내 처자식보다 더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정말 자신이 아픈 것처럼 함께 울어주고 함께 신음하는 진정한 목자의 삶을 보며, 제 삶이 부끄럽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수감이 되고, 가족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두 흩어지게 됩니다. 손종일 장로는 만주로, 아내와 어린 아들은 남해 깊은 산골짜기로, 어린 딸과 막내아들은 고아원으로, 첫째와 둘째 아들은 나병 환자들이 사는 산속으로. 그런데 1년 만에 해방이 되어 모든 가족이 애양원에 다시 모여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죠.

손 목사님이 수감되었을 때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요한계시록 2장 10절 말씀 아시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자격 없습니다. 끝까지 신사참배 하지 마세요.” 이러한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손 목사님은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주는 ‘옥중 성자’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독방에 갇히고, 영양실조로 양쪽 시력이 점점 약해져가고, 한겨울에는 손톱과 발톱이 모두 짓물러 빠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목사님은 기도, 성경묵상, 찬송을 꾸준히 했고, 오히려 교우들에게 이런 편지를 쓰셨습니다. “부디 안심하시기를 엎드려 주야로 구하나이다. 어떠한 고난이라도 다 자족하게 여깁시다. 불만 있는 자는 천하를 다 얻어도 오히려 불편할 테요. 자족을 느끼는 자는 한 줌의 밥과 한 숟가락의 물에도 기쁨이 있으리다. 고로 모든 염려는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하사이다. 근심은 만병의 근원이나 즐거움은 백병의 양약이 되리다.”

3년 형을 마치고 출소 예정일이 되었지만, 신사참배를 여전히 거부하는 손 목사님은 무기징역 형을 받게 되어 6년간의 옥고를 치렀는데, 결국 하나님은 이 땅을 해방시키셔서 손 목사님을 꺼내셨습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계속 지자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목사 때문이라 하여 8월 17일에 전부 죽이기로 계획하고 있었답니다. 해방이 8월 15일이었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1948년 여순사건으로 인해 두 아들(동인, 동신)이 순교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먼저, 민주주의자들이 그 다음 여수와 순천 주민들을 죽이면서, 2,600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겁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이념으로 사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손 목사님은 장례식에서 ‘아홉 가지의 감사’를 낭독하며 오히려 살인자 ‘안재선’을 아들로 삼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여기서 생겼죠. 그리고 2년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가야 한다고 성도들이 권면했지만, 1,000명의 나병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하며, 1950년 9월 28일(49세) 여수의 한 과수원에서 순교합니다.

제가 방문한 애양원 순교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로 호흡을 삼고, 성경으로 양식을 삼고, 복음 전도로 생활을 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고, 원수에게도 사랑의 사도로, 고난을 받는 개인과 민족에게는 소망을 주는 삶을 살았던 손양원 목사.”

우리가 하나님 부르심을 받을 때,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이훈 목사(하늘뜻섬김교회 담임) www.servingod.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