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은 LA 폭동이 일어난지 20년 되는 날입니다. 흔히 4.29로 기억되는 날입니다.

미국에서 1992년 LA 폭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흑인인 로드니 킹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3명의 백인 경찰과 한 명의 히스패닉계 경찰에게 배심원이 방면 판결을 하면서 터졌습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남의 집안 싸움이나 먼산의 산불처럼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한인 타운이 전쟁터 폐허가 된 것처럼 폭동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한인들은 그 피해를 극복하고 사업과 공동체를 회복해 냈습니다. 재산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에 비해서 4.29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에게 더 큰 회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4.29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미국에 한인들이 대규모로 이민오게 된 것은 케네디 대통령 당싱의 이민법 개혁 때문이었습니다. 유럽계 이민자 중심의 이민법이 개방되면서 한인들의 이민이 대규모로 늘어 났습니다. 60년대 이전에 주로 유학생으로 와서 자리잡은 이민자들은 한인 사회를 형성하기보다 미국의 주류 사회에 편입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이민법 덕분에 이민온 한인들은 급속히 규모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한인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한인교회, 한인 상가, 한인 타운 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한인 사회가 형성되는 것은 인민자들의 역사에서 항상 있는 현상입니다. 수백년된 이민과 정착의 역사를 가진 타 민족들이 지금도 자기들만의 색갈을 유지하면서 민족성이 강한 지역사회를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한인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은 우리보다 앞서서 이민을 왔던 타 민족이 경험하지 못했던 독특한 환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의 민권운동을 통해서 많은 희생자들이 피를 흘리기까지 하면서 인종차별, 지역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거대한 민권 혁명이 이루어진 직후에 한인들이 대거 이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인들은 한인사회를 구성하면서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차별을 겪지 않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칸 뿐 아니라 유럽에서 온 유대인, 가난한 아이랜드인, 비 영어권인 이탈리아인, 슬라브 문화권에서 온 폴란드인, 헝가리인 등 모든 이민자들이 지독한 인종적인 차별과 경제적인 차별을 겪으면서 이민의 역사를 써 왔었습니다. 한인들은 수백년동안 뿌리 내렸던 차별의 역사를 사회적인 홍역을 치르면서 도려낸 직후에 이민을 와서 상대적으로 심각한 차별없이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4.29 폭동은 한인들에게 모든 이민 민족이 겪었던 현실을 직접 경험할 기회였습니다. 4.29 폭동을 통해서 많은 자각과 새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인들의 정체성이 뚜렸해졌다는 것입니다. 폭동 당시까지만 해도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크게 관심없이 한인 사회와 격리된 채 활동하면 1세대 1.5세 젊은 세대가 부모들이 세운 한인타운에 돌아 왔습니다. 직접 총을 들고 부모들의 재산을 보호하기도 하고 왜곡된 보도가 나가고 있던 방송국과 신문사에 찾아가 인터뷰하고 항의하기도 하면서 세대간의 간격이 좁혀졌습니다. 4.29를 통해서 처음으로 조직된 1.5세 단체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게 되고 지금까지도 한인들의 주류 정치 진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4.29를 통해서 세대간에, 지역간에, 이민 온 시대에 따른 차이와 간격이 없어지고 우리는 다 하나라는 의식이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정체성은 결코 내부에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나 단체,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도 우리 안의 차이를 보는데서 눈을 돌려 남을 보기 시작할 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강력한 정체성도 교회 내부에서 찾지 못합니다. 전도의 현장에서, 선교의 현장에서, 핍박의 현장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치열한 사역의 현장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