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한국에 잠시 다녀 왔습니다. 부친의 팔순 잔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30년 만에 보게 될 어린 시절 교회 가족들을 만나는 일정이 빠듯하게 잡혔기 때문입니다.
부친은 평생을 목회자로 사셨습니다. 젊은 시절 군 생활 중에 군목이 되신 후 교회를 개척하시고 천연동성결교회에 부임하셨다가 마지막으로 성북성결교회에서 22년간 목회를 하신 후에 은퇴하셨습니다. 22년의 목회 내내 100교회 개척, 100나라 선교를 목표로 하셨습니다. 조금 일찍 은퇴하신 후 선교를 말로만 했다고 여기시고 거의 20년의 세월을 선교 현지에서 보내셨습니다. 미국에서 교회 개척 사역을 하시다가, 멕시코, 인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사역자들을 훈련하시고, 중국에서 수 많은 처소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시고, 인도네시아에서 최근까지 교회를 섬기고 사람들을 훈련하셨습니다.
아들이 목사라고 제대로 챙겨 드리지 못하고 목사 사위와 딸이 선교사라고 변변히 돌봐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앞장 서서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예상 인원을 훨씬 넘어서 준비된 자리가 가득찼습니다. 절반의 하객들이 서서 감사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아버지 쪽의 사촌들과 조카들이 모였습니다. 외가쪽 삼촌과 사촌들이 모였습니다. 대부분은 22년간 목회하신 성북교회 가족들이고 출신들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30년 만에 보는 얼굴들이었습니다.한국을 떠날 때 성북교회를 섬기던 장로님에서, 주일학교와 중고등부의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이 모였습니다. 순서를 맡은 분들이 이제 손자를 보게 된 연배에 들어선 나이에 소개에 빠뜨리지 않던 것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교회에 처음 나와서 세례를 받고 말씀을 들으면서 자라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이 이제 장성한 자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배와 축하 순서에는 주일학생 시절, 중학생 시절 말씀을 받고 신앙의 훈련을 받았던 옛 성도들이 자녀들이 맡아 주기도 했습니다. 중학생 시절 중고등부를 맡았던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목사님이 제게 세례 주신 것 기억하세요?” “기억나지.”
제대로 연락도 못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모였습니다. 하루 이틀 만에 소식을 전해서 만사 제쳐 놓고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한결같이 영적인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육신의 자녀들보다 더 가까이서 더 살뜰하게 돌봐 주시기도 했습니다.
교회 개척 초기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15년의 목회 현장에서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을 더 많이 던지게 됩니다. 목회는 건물도 남기는 것도 아니고, 명 설교를 남기는 것도 아니고, 책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목회는 “나의 면류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 자녀를 남기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부친이 사시는 작은 아파트에서 같이 지내면서 아침 산책과 북어국 아침 식사를 하면서 두런 두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직도 아들 걱정하면서 잔소리를 놓지 못하시는 부친 곁에서 27년이 지난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부친은 평생을 목회자로 사셨습니다. 젊은 시절 군 생활 중에 군목이 되신 후 교회를 개척하시고 천연동성결교회에 부임하셨다가 마지막으로 성북성결교회에서 22년간 목회를 하신 후에 은퇴하셨습니다. 22년의 목회 내내 100교회 개척, 100나라 선교를 목표로 하셨습니다. 조금 일찍 은퇴하신 후 선교를 말로만 했다고 여기시고 거의 20년의 세월을 선교 현지에서 보내셨습니다. 미국에서 교회 개척 사역을 하시다가, 멕시코, 인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사역자들을 훈련하시고, 중국에서 수 많은 처소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시고, 인도네시아에서 최근까지 교회를 섬기고 사람들을 훈련하셨습니다.
아들이 목사라고 제대로 챙겨 드리지 못하고 목사 사위와 딸이 선교사라고 변변히 돌봐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앞장 서서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예상 인원을 훨씬 넘어서 준비된 자리가 가득찼습니다. 절반의 하객들이 서서 감사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아버지 쪽의 사촌들과 조카들이 모였습니다. 외가쪽 삼촌과 사촌들이 모였습니다. 대부분은 22년간 목회하신 성북교회 가족들이고 출신들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30년 만에 보는 얼굴들이었습니다.한국을 떠날 때 성북교회를 섬기던 장로님에서, 주일학교와 중고등부의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이 모였습니다. 순서를 맡은 분들이 이제 손자를 보게 된 연배에 들어선 나이에 소개에 빠뜨리지 않던 것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교회에 처음 나와서 세례를 받고 말씀을 들으면서 자라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이 이제 장성한 자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배와 축하 순서에는 주일학생 시절, 중학생 시절 말씀을 받고 신앙의 훈련을 받았던 옛 성도들이 자녀들이 맡아 주기도 했습니다. 중학생 시절 중고등부를 맡았던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목사님이 제게 세례 주신 것 기억하세요?” “기억나지.”
제대로 연락도 못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모였습니다. 하루 이틀 만에 소식을 전해서 만사 제쳐 놓고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한결같이 영적인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육신의 자녀들보다 더 가까이서 더 살뜰하게 돌봐 주시기도 했습니다.
교회 개척 초기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15년의 목회 현장에서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을 더 많이 던지게 됩니다. 목회는 건물도 남기는 것도 아니고, 명 설교를 남기는 것도 아니고, 책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목회는 “나의 면류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 자녀를 남기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부친이 사시는 작은 아파트에서 같이 지내면서 아침 산책과 북어국 아침 식사를 하면서 두런 두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직도 아들 걱정하면서 잔소리를 놓지 못하시는 부친 곁에서 27년이 지난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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