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12-14절,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주 예수님은 3장 마지막 부분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그리고 4장에 와서 사십일 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주님은 세 가지 시험에서 완전하게 승리를 하셨다. 그런 다음에 12절에서 요한이 잡히셨다는 것을 들었다.

요한은 주 예수님의 선주자로서 그분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다 걸어갔다. 그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또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그는 회개하라고 외쳤으며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요한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종이든지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발걸음을 다 걸으면 이제 마쳐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요한의 세례와 주 예수님의 세례가 겹쳐져 동시에 두 종류의 세례가 행해질 때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을 따르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는데,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을 위해서 시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분을 위해서 일해야지 조금이라도 주님 자신과 상충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주 예수님이 일어나서 사역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면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주님이 일하시고 또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계시는데 그도 여전히 한쪽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그럴 때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목 베임을 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요한은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다 했으면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달려 갈 길을 다 마쳤다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일생의 마지막에 가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느낀 것을 볼 수 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다.

하여간 요한의 사역은 다 마쳐졌고 요한이 잡힌 것을 들으셨을 때 주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셨다. 갈릴리가 어디인가? 갈릴리 땅은 이방 땅이라 불리웠다. 왜냐하면 갈릴리 땅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다.

이런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멸시하는 말이다. 오늘날 미국에 가면 어떤 지역에는 멕시칸들이 살고, 어떤 지역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살고, 어떤 지역에는 흑인이 사는데, 미국인들은 그들과 섞여 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백인들만 사는 곳을 아주 선호하고 흑인들이 사는 할렘가라든가 하는 곳을 아주 멸시한다. 갈릴리는 그러한 곳이다. 주님은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셨다고 했다. 갈릴리 나사렛, 주님은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빌립이 말한 것처럼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의 관념에 매우 천박한 도시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 말소리도 강한 악센트를 갖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잡히셨을 때 주님을 세 번 부인했는데 그 악센트 때문에 걸릴 뻔했다. 한 비자가 베드로에게 ‘네 말이 네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다. 그런데 주님은 먼저 이 갈릴리 나사렛에 계시다가 거기를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주님은 요한이 잡히셨다는 말을 들은 후 이젠 사역을 시작하셔야 한다고 느끼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인가? 이는 ‘물러가셨다’라는 표현에서처럼 그 분은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곧 처형할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신 것이다. 물러가셨다는 것은 헬라어로 ‘아나코레인’으로 위험에 직면했을 때 물러가는 것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사역의 시작부터 예루살렘과 같이 반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하시지 않고, 할 수 없이 받을 수 있는 곳을 택하여 사역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은 당시 멸시받는 동네인 나사렛으로 가셨지만 또 금방 그곳을 떠나셔야 했다. 왜 주님은 나사렛을 떠나셔야만 했는가? 이 일은 여기서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고 누가복음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 4장 16절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주님이 자라나신 곳은 나사렛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다. 나사렛 예수,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천박한 땅, 야만적이고 아주 촌스러운 지명으로 통한다. 주 예수님은 그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그런데 그곳에서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이사야의 책을 펴서 드리니까 한 구절을 주님이 읽으셨다. 이것이 그분의 사역 초기에 하신 일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그러면서 주님은 오늘날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을 기이히 여기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멸시하는 말들을 했다. ‘의원이라면 너부터 고쳐라.’ 이것은 다 멸시하는 말들이다.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이런 말들도 다 멸시하는 말들이다. 그러자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결국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쳐 내려 하는 사건이 바로 그분의 고향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때 주 예수님은 그 무리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아무도 주 예수님의 그런 위엄을 범할 수는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분을 끌고 낭떠러지까지 가서 밀쳐 내려고 했지만 주 예수님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저희 가운데로 그냥 지나서 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철저하게 배척을 당하셨다. 그렇게 멸시하는 곳에서는 주님이 일하실 수가 없다. 성경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주님이 이상히 여기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더 이상 증거할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렛을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영예스럽게도 주님의 사역의 첫 번째 지경으로 선택이 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