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나 또는 기도 모임등은 매우 바람직한 신앙 현상이므로 격려함이 마땅 할 것이다. 그렇지않아도 한국교회의 기도가 기복주의에 빠져 나 중심 그리고 기껏해야 우리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터에 불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위하여 기도해주는 일들이 벌어지니 이 아니 기쁠수가 있겠는가 마는 거듭난 신자라 할지라도 중보하여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경에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께 대해서만 사용된 지극히 신학적인 단어인 까닭이다. 그 내용은 범죄한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실 수 있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외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하는 성경으로 갈3:20, 히12:24, 히8:6 히9:15절 등이 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위하여 중보기도한다는 것을 위험하게도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는 말이 된다. 평신도들이야 이같은 내용을 모르니 그저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없이 사용한다 하더라도 지도자들이 버젓이 중보기도팀이니 중보기도학교니 중보기도그룹이니 하면서 교회 성장의 한 방편이나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것은 신학부재의 탓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제 2권 6장에서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위격”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보자라고 정의하면서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아야 한다”라는 제목 아래 첫째, 중보자의 필요성, 둘째, 구약 백성들에게는 중보자를 떠난 하나님은 없다고 계시해 주셨고 구약의 중보자는 예언된 기름부음 받으신(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 중보자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칼빈은 구약의 신앙과 소망은 중보자인 메시아의 약속 가운데 근거한다고 했다. 따라서 구약의 중보자 개념은 메시아의 중보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지 오늘날 우리들이 중보자, 내지는 중보 기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약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이신 까닭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합동) 제 89회 총회(2004)는 신학부를 통해 "중보기도"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중보기도" 용어 대신 "이웃을 위한기도"라는 용어로 사용하기로 결의 했다. 아주 바른 신학적 결의라 생각된다. 이웃을 위한 기도가 서술적인 표현이요 신학적 용어로는 비교적 긴 단어라 생각된다면 대도(代禱)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대도라는 단어가 투박하다면 '대신하는 기도'라 해도 무방할것이다. 이웃을 위한 기도이든지 혹은 대도이든지 간에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는 이렇게 왁자찌걸 한판 벌이는 축제형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그의 기도신학으로 말한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는 기도여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