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덱거가 말의 정의에 대해 말하기를’언어는 존재의 집’인데 이것은 누에고치가 실을 만들어 내고 누에가 그 속에서 살듯 인간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따라 복 (福)과 화(禍)를 누리게 된다고 언급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나이에 따라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맵시가 더욱더 고와야하고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때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하며 특별히 아랫사람들에게 말을 하려고 할때 ‘격려와 축복’이되는 말을 하면서 살아가 야 아랫사람으로 부터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끔씩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어린아이 들이라도 다 각기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으며 그들도 삶을 통해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뿐 아니라 하는 일을 통해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어도 윗 사람으로부터 격려를 받아 자신 감을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커가는 자녀들에게 때로는 삶을 배우는 기회가 빈번해 지는 것을 느끼는 적이 한 두번이 아님을 알게된다. 부모가 바라보는 자녀들은 언제나 어린 아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아버지 제가 이제 다 알아 서 합니다. 저를 더 이상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세요, 성적이 좀 떨어져도 격려해주시면 안되요” 라는 말들이 때로는 말하는 부모들의 고개를 숙이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연합예배를 드리기위해 필자의 딸에게 찬양팀에서 주일날 아침예배때 봉사하도록 권면했을때 딸아이에게 강한 펀치를 한방 맞았다. 그것은 바로 “아빠는 왜 항상 오빠에게 물어 보지 않고 나에게만 찬양을 권면합니까? 오빠도 노력할려고 하고 찬양을 열심히 부르는데 오빠도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이었다.

그 소리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면서 마음속으로 너무나 부끄러움을 갖게 된 것인데 아비 로서 자식을 바라보는데 편견의 사고속에 노력하는 아이보다는 타고난 자질을 가진 아이를 더 선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고 그것 때문에 뭔가 하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도전과 격려의 기회”가 쉽게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머리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은 찬양을 하는데 있어서 목소리가 크고 정확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누군가 음치의 소리를 내면 너무나 쉽게 ‘날카로운 화살’을 던지게된다. “얘 저 음치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고그래 음치이니까 시키지말고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해” 라는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가지는 사람을 바닥에 주저 앉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음치라는것 때문에 사람들의 귀에 거슬린다 생각하여 평생동안 남 들 앞에서 노래한번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노래를 멋지게 부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를 살리는 격려의 말을 듣게 되면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게 될뿐 아니라 자신감으로 인해 음의 감각이 살아나서 기교를 부리는 노래를 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주변 사람들로 부터 많은 사랑의 격려 박수를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남보다 뛰어 나다고 생각하거나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이나 어린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특별히 부모들이 친구들을 만나 자녀들이 인류 대학에 들어간 것을 들으면 집에 돌아와서 자녀들에게 “아빠 친구 아들은 명문대학에 들어갔는데 너는 뭐냐 창피해 죽겠다.”라는 말은 자식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말이 때로는 몸을 꽤 뚫는 화살촉과 같으며 몸에 피를 내게하는 창이나 칼로도 둔갑하고 말로 사람의 영을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목회를 하려고 하는 신학교 후배에게 뼈아픈 마음의 상처를 준 기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뭐하러 힘든 목사를 하려고 하는가? 목사가 되려면 자질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이결낼 자신감이 있는가?” 라는 말로 실망감을 주었다. 그러고 난 후 뭔가 마음에 미안한 감이들어 그 후배 전도사와 같은 지방회에 속한 어느 목사님에게 그 전도사님의 가정 배경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때 그 목사님이 말하기를 예 그 전도사님 가정이 너무 힘듭니다.

전도사님 사모님이 장암 말기인데다가 암이 폐와 간과 난소로 전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얼마전에 난소암을 제거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넷이나 있는 젊은 사모 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순간 가슴이 철렁내려 앉으면서 생각되는 것은 무심코 던진 화살이 앞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젊은 전도사님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하는 생각속에 너무나 미안 하였고 전도사님의 내면의 삶의 아픔을 알고 난 후부터 더욱더 견딜 수가 없어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하기 위해 전도사님에게 가서 정중히 사과를 했다.

전도사님! 정말로 미안합니다. 전도사님을 좀더 이해하려고 생각을 했거나 전도사님의 아픔을 알았다면 그런말을 하지 않았을텐데 제가 실수한 것 용서 바랍니다.

나 자신도 제대로된 목사가 아니면서 미래를 향해 나가려고 하는 젊은 전도사의 자격을 이야기 했다는 것은 나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본 것이라 생각하여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 말씀이 마태복음 7:3-4절에 기록되었는데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이것을 볼때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데 있어서 좋은 말도 가려서 해야 할 것이며, 충고도 충분히 살펴 보아야 하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같은 말이라도 향기로운 말과 누군가 우울한 사람의 마음을 뻥 둟리게 하는 축복된 말이 있다면 우리는 “삶의 희망의 말”들을 선택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 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말을 잘할 때 이야기이고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말의 힘의 긍정적인 부분을 본다면 꿈을 가지는데 많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실망과 좌절의 문턱에 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의 원동력이 되게 하는 것이며 정신적인 마음의 질병을 가진자 를 치유하는 치료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감동과 은혜를 받아야 내 자신이 볼 수 없는 사랑을 보게 되고 남을 늘 배려하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어우려져 사랑과 아픔과 기쁨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앎으로 인해 삶의 희망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인간은 창조된 것이다.이것을 위해서는 모두가 비판의 입술보다는 격려와 축복의 입술이 되어 살아 가야 할 것이다.

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문의전화)425-773-9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