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벌판에 두 언덕, 山 사이는
지금도 그대로 숲 벌판이다

나는 당장에라도 쩡쩡 울리는 두 장수의 소리가
하늘을 갈라 퍼져가는 듯
외침으로 하여,
하늘 과 땅이 흔들리고
떨 리우는 온통 좌우 숲을 본다

지금, 우리 모두의 周邊은
이 두 외침 소리에
세상 騷亂은 흔들리고 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갈등의 계곡 사이에서
나도 진실에 서야할 위치, 바로 정하고서
소리 쳐 내야 한다

결국 맨 손 주먹으로라도
정의는 이기고 마는 법

메아리는
초목 과 산천을 흔들어
너와 나의 마음 속
깊은 溪谷에 까지 움틀 거려
나, 서야 할 곳을 찾아서
계속 더듬어 가고 있는 것..

세상은 멈춤 없이
소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그 어느 날의 결국 의 마주 할
그 아침 까지_

여기가, 소년 목동 다윗이 차돌 팔메 짓 돌멩이 하나로, 어기 찬 대형 골리앗 장사를 나둥그러지게 하였다는 溪谷 山間인가! 나부터도 놀라움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장소에 와 섰다는 자부감에서도 세상에 두려울 것이 다시는 더 없겠다고, 자신 속에 대 豪氣를 세웠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 때 거기 서 있었던 氣槪를 떠 올리면, 아직도 무서울 게 세상 무엇 없겠다는, 속숨은 용기가 불끈 솟아 올르 군 합니다. 사실, 신앙 하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어디 있겠습니까. 때때로 그게 모자라서 어리석게도 몸 주저주저 하군 하는 것일 테니까요. 때마다_ 무엇 장애물 무릅쓰고라도 다시_ 아니, 그렇지 못한다면, 말 만이라 해도, 또 거기 가 서보고, 목동 다윗의 氣槪 生命力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상왕정리 와 하왕정리. (連作 詩 3)
( 1944년 日帝下의 겪었던 슬픈 작은 이야기_ )

그러던 어느 날, 난 연극반에 이끌려서, 한 밤 중
연극 중, 兒 役 臺詞로 시골 대청 무대에 섰던 기억 속,

그리고 이차대전 종료하는 해방의 날을 맞았지
사실은 그 때 나는, 해방 이라는 것조차 몰랐었던 것

지금 말하자면, 누런 창호지에 어줍 쟎게 그려진
태극기를 보았고
옆의 집 일본 교장 가족은
어느 듯 간 곳이 없이 사라져 버렸더군..

그러던 어느 날, 거기 하왕정리 해변 가 달려 나갔을 때는
하얀 작은 비행기, 아마도 전투기 같았는데
당시 내 눈에는 서양인이 공군 복장을 하고 어리둥절 서있는,
고만 38선을 잘 못 타고 넘어 올라 와
불시착 한 모양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였고
그 후에, 그 조종사의 향방은 지금까지도 궁금하여 져 있는데,

그 해 겨울, 부교 장이었던 매형은
양양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 되어
누님 댁 식구들 6식구와
양양거리 언덕 위의 교장 양옥 사택으로 옮겼고
겨울 맞아, 치운 논바닥 어름위에
고무신에 새끼줄 매고서 얼음지치기도 하였는데..

서울 소식에는
아버지가 軍政廳 출판국장으로,
미 군정장관 번역 과 통역으로 활동하신다는 소식에

어느 날 매형은
막힌 삼팔선을 넘자고 결심하고,
우리 둘은 밤 자정 잠을 깨고
정말 숨어서, 숨어서 달이 뜬 어두운 산 계곡을 기어 탔는데_

훤한 새벽 동이 틀 무렵
우리 기어 내리는 산모래 흙바닥 옆에
땅 모래 먼지 피우며, 우릴 찾아내서,
피융 피융 로스케 총알들이 사방 떨어지고
그 모래사이 뚫고 뚫어 한 없이 산허리 흙바닥을 뛰었지,

한 참 결에 고개 마루턱 강릉 郊外쯤일 가,
처음 보는 성조기가
새벽 파란 아침 멀리 하늘가에 자그맣게 펄럭이고
우린 마침내, 넘어 온 거야_

그 전 초등학교 마당에서 붉은 테 모자, 로스케 장교는 보았었지만,
처음 본 미군 튜럭에 타고 달리는 낯 선 미국 兵士들이
왜 그리도 그 땐 무섭게 보였었던지,

반으로 자른 드럼통에, 추운 나무 불 펴 놓은 겨울 새벽 아침,
우린 몸 짓 발 짓 하면서 겨우 소통 만들어
어느 미군인 지프차에 끼어, 붙여 줌을 타고, 매달리다 시피
바람 찬 주문진 시내로 들어섰고 처음 본 그 때 그 성조기_
지금도 내 눈엔 반짝이네.

그 새벽 녘, 원주 향하는, 숯불로 움직이는
털털대는 버스 올라타고,
무슨 이름? 말로 만 들어, 기억 속에 막 생각나는 대로
박달잴 가 뭘 가, 같은
눈 밭 고개 넘고 넘어서
재가 하도 높아 당시 발음대로, 숯불 때서 움직이는 빠스가
오르지 못하면
고개 돌아 돌아 쉬어 쉬어, 숯불을 다시 부채질해서 불 붓치고
사람들은 내려 버스를 밀면서
고개 재를 넘어, 겨우 한 밤 중, 原州에 내렸어

뜨끈뜨끈한 여관방에
가득 찬, 피란에서 돌아오는 코고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남 등 닿는 내 뒷등이 낯설고 이상했어,
잠간 눈 부치다가, 한 밤 중 차창도 없는 기차에
시간 맞춰 올라타고
연기 한 가득 속, 석탄기침 칵칵하면서
캄캄한 터널도 몇 몇 개나 지나_

아침 녘 청량리역에 내렸어.
참 일 년 반 만에, 처다 보는 전차와 전차 길의 감격
그처럼 또 이야기는 길-게 이어 이어지고,

우리 삶의 굴곡도 그렇게 그렇게 이어져서
이 새벽 석 점쯤,
방안 천정에는 긴 그림 가물가물 그려져 가네.

이 나의 시에는 그시절 막 생각하는 대로 <박달재>같다고 하였지만, 몇 해 전 그 비슷한 곳을 찾아 가 보니, 아마도 그 마루고개는 위치상_ 지금 <한계령>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곳이었을 겁니다. 여기, 連作詩 형태로, 오늘은 <連作詩 3>을, 마음에 그려지는, 그 옛 어렸을 적에의 나의 현실을, 맘에 지금도 가끔 떠올려지는 대로, 맘 영상으로_ 서, 너 번에 걸쳐 글 올려가 봅니다. 그저 <어느 낡아 헤어진 그림 童話集> 보듯이 재밌게, 또 맘 아프게 읽어보면 어떨까 하여, 올립니다. 惠化초등학교(당시는 日帝 下였으니까 국민학교 때,) 2학년, 막 올라가서_ 나는 십대 중반쯤 되시는, 당시 이화여중생 둘째 누이 손을 잡고, 강원도 양양 아래 조그마한 마을_ 2次大戰 末, 被屬國 맘 저린 모습으로, 말로는 피난 차라 하였지만, 사실은 일제 시 조국 독립 운동에 참여해서 서대문경찰서 감옥을 들락거리며 고문도 당했든, 한 가난한 崔相鉉 牧師 집의_ 당시 밥 한 그릇이나마 줄이려고, 나를 떠나보냈든_ 나 찾아 간 시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상왕정리. 하왕정리>라고 그 때 내 귀에 들렸던 대로 이름 적어놓았지만, 얼마 전, 구글의 입체 지도를 펼쳐보다가, 그 때 그곳을 찾아보니, 상광정리, 하광정리 이었습니다. 언젠 가 한번 쯤, 그 곳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