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환경이 어렵다고 투덜거린다. 부모가 가난하고, 조직이 엉망이고, 직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기 쉽다. 그런데 코리아나 화장품의 유상옥 회장은 꾸준하게 자기계발을 해나가면 환경의 문제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상옥은 충남 청양에서 3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힘만으로는 여섯 형제를 다 공부시키기 어려운 살림이었다. 장남이던 그는 자신만이라도 학비 정도는 스스로 벌어 부모의 부담을 덜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조그만 신문 배급소를 맡아서 혼자서 신문 받고, 배달하고, 수금하는 일까지 한다. 이 와중에도 대학입시 공부를 준비했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신문보급소 일을 계속했다.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집안 가장 역할도 해야 했기에 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유학이란 꿈은 접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배움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대학 졸업 후 동아제약에 입사한지 2년 만에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공인회계사 시험을 본 것은 회사를 떠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직장과 집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생활에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유상옥이 ‘젊은 청춘을 게을리 보낼 수 없다’고 다짐하며 열의를 다졌던 결과였다. 또한 공인회계사도 국가에서 인정하는 시험으로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한 변형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시험인 만큼 통과해서 꼭 인정받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다. 동료들이 모두 다 퇴근하면 회사 앞 분식집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다음에 회사로 다시 돌아와서 회계학 책을 뒤적거리며 이 새로운 도전에 몰입했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다고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러한 성취감은 소중한 것이었다. 유상옥은 만일 혈기왕성한 청춘이 아니었다면 아마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중도하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모두 때가 있다고 말하며 젊을수록 코피를 쏟을 수 있는 열정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도 전반적인 회사 업무 파악에 노력했고 경영학 이론을 회사에 적용하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래서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할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그 때의 경험이 후일 회사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직원들 교육이나 외부 프레젠테이션에서나 연설에서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입사한지 9년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동아제약의 계열사인 라미 화장품의 대표이사로 취임한다. 당시 적자로 허덕이던 기업이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지만 회사일 이외에 좋아하는 모든 취미를 포기하고 틈틈이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아예 회사 근처에 숙박시설을 얻어 매일 밤에 공부 했고, 주말을 집중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3년간 이를 악물로 노력한 덕택에 논문을 완성했다.
<한국 화장품산업의 마케팅에 관한 연구>였다. ‘방문판매를 중심으로’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이때의 이론적, 실증적 연구가 라미 화장품의 방판 구축뿐 아니라 후일 코리아나의 판매조직 입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대학 간판만 따면 되고, 졸업 후에는 좋은 직장만 들어가면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고 있지 않나 우려했다. 그렇게 그 결실만 따먹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성취 이후에도 더욱 더 부지런히 자신을 계발해나가야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문팔이 소년에서 코리아나 화장품의 최고경영자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유상옥 회장의 성공철학은 3가지로 요약된다.
1.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 유상옥은 후배 직장인들에게 좀 더 그럴듯한 일에 시간을 투자해 보라고 권유한다. 회사를 위해서도,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회장은 공자가 이야기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말을 좋아한다. 배우고 익히는 것에 늘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이 뛰어났던 셈이다. 아무도 그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더 배워야겠다는 욕구에 늘 불타 있었던 것이다. 신문팔이 소년이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회사 사장이 되어서까지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팔순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2.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끈기: 유상옥 회장은 위대한 일을 이루어내는 힘은 뛰어난 능력이 아닌 포기하지 않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끈기와 우직함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미덕입니다. 눈앞의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40년 넘게 유지해온 끈기와 우직함이 오늘날 저를 만든 것 같습니다."
3. 융통성과 과감한 결단력: 첫 직장에 입사한지 6년 동안이나 기획관리 일을 맡다가 갑자기 영업 업무로 배치되었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기업 성장의 척도가 되는 영업을 현장에서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받아들였다. 가방을 들고 판매 일선에서 뛴 것은 아니지만 영업을 현장 지휘하면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판매 성적을 3년간 올렸다. 1974년 127억 원이었던 동아제약의 매출은 1977년에 345억 원으로 신장했다. 이 영업경험을 통해 향후 경영자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이후 적자기업이었던 라미화장품을 맡아 반석에 올려놓았지만 1989년 어느 날 오너 회장으로부터 ‘본사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대표직을 물러나 지방의 전혀 다른 사업부로 발령조치를 받았다. 이번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과감하게 20여년이나 몸담았던 회사를 뛰쳐나온다. 이런 게 월급쟁이의 한계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직접 화장품 회사를 차리고 5년 만에 1천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성공 가도에 접어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조그만 신문 배급소를 맡아서 혼자서 신문 받고, 배달하고, 수금하는 일까지 한다. 이 와중에도 대학입시 공부를 준비했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신문보급소 일을 계속했다.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집안 가장 역할도 해야 했기에 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유학이란 꿈은 접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배움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대학 졸업 후 동아제약에 입사한지 2년 만에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공인회계사 시험을 본 것은 회사를 떠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직장과 집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생활에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유상옥이 ‘젊은 청춘을 게을리 보낼 수 없다’고 다짐하며 열의를 다졌던 결과였다. 또한 공인회계사도 국가에서 인정하는 시험으로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한 변형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시험인 만큼 통과해서 꼭 인정받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다. 동료들이 모두 다 퇴근하면 회사 앞 분식집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다음에 회사로 다시 돌아와서 회계학 책을 뒤적거리며 이 새로운 도전에 몰입했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다고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러한 성취감은 소중한 것이었다. 유상옥은 만일 혈기왕성한 청춘이 아니었다면 아마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중도하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모두 때가 있다고 말하며 젊을수록 코피를 쏟을 수 있는 열정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도 전반적인 회사 업무 파악에 노력했고 경영학 이론을 회사에 적용하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래서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할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그 때의 경험이 후일 회사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직원들 교육이나 외부 프레젠테이션에서나 연설에서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입사한지 9년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동아제약의 계열사인 라미 화장품의 대표이사로 취임한다. 당시 적자로 허덕이던 기업이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지만 회사일 이외에 좋아하는 모든 취미를 포기하고 틈틈이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아예 회사 근처에 숙박시설을 얻어 매일 밤에 공부 했고, 주말을 집중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3년간 이를 악물로 노력한 덕택에 논문을 완성했다.
<한국 화장품산업의 마케팅에 관한 연구>였다. ‘방문판매를 중심으로’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이때의 이론적, 실증적 연구가 라미 화장품의 방판 구축뿐 아니라 후일 코리아나의 판매조직 입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대학 간판만 따면 되고, 졸업 후에는 좋은 직장만 들어가면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고 있지 않나 우려했다. 그렇게 그 결실만 따먹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성취 이후에도 더욱 더 부지런히 자신을 계발해나가야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문팔이 소년에서 코리아나 화장품의 최고경영자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유상옥 회장의 성공철학은 3가지로 요약된다.
1.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 유상옥은 후배 직장인들에게 좀 더 그럴듯한 일에 시간을 투자해 보라고 권유한다. 회사를 위해서도,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회장은 공자가 이야기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말을 좋아한다. 배우고 익히는 것에 늘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이 뛰어났던 셈이다. 아무도 그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더 배워야겠다는 욕구에 늘 불타 있었던 것이다. 신문팔이 소년이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회사 사장이 되어서까지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팔순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2.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끈기: 유상옥 회장은 위대한 일을 이루어내는 힘은 뛰어난 능력이 아닌 포기하지 않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끈기와 우직함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미덕입니다. 눈앞의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40년 넘게 유지해온 끈기와 우직함이 오늘날 저를 만든 것 같습니다."
3. 융통성과 과감한 결단력: 첫 직장에 입사한지 6년 동안이나 기획관리 일을 맡다가 갑자기 영업 업무로 배치되었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기업 성장의 척도가 되는 영업을 현장에서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받아들였다. 가방을 들고 판매 일선에서 뛴 것은 아니지만 영업을 현장 지휘하면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판매 성적을 3년간 올렸다. 1974년 127억 원이었던 동아제약의 매출은 1977년에 345억 원으로 신장했다. 이 영업경험을 통해 향후 경영자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이후 적자기업이었던 라미화장품을 맡아 반석에 올려놓았지만 1989년 어느 날 오너 회장으로부터 ‘본사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대표직을 물러나 지방의 전혀 다른 사업부로 발령조치를 받았다. 이번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과감하게 20여년이나 몸담았던 회사를 뛰쳐나온다. 이런 게 월급쟁이의 한계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직접 화장품 회사를 차리고 5년 만에 1천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성공 가도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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