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며 교회 청년 대학부에서 지도해 온 여자 제자가 있다. 어느 덧 결혼을 해서 8살 난 딸과 6살 난 아들을 두고 있는 어엿한 30대 중반의 가정 주부가 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가르쳤고 결혼도 친히 주례를 하였고 아들딸들도 다 유아 세례를 주었으며 집사로 임명하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니 친 가족이나 다름없이 사랑이 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탄절 이른 아침에 그 여 집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 그리 쉽사리 전화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조금은 의아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전화는 했는데 “목사님!” 이 한 마디만 해 놓고 울고 있다.
가슴이 덜컹 내려 않는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차마 무슨 일인가? 하고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엔 십중팔구 좋지 않는 일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니 마음을 진정한 그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엄마가 지금 수술을 받으려고 하니 병원에 와서 기도 좀 해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모처럼 가족들이 성탄절을 맞아 집에서 함께 모이기로 되어 있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지만 허둥지둥 준비하고 워싱턴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침상 머리에 아들과 딸들 그리고 사위가 둥글게 모여 있었다. 자녀들은 이곳 시애틀에서 살고 있으나 부모님은 300마일쯤 멀리 떨어져 있는 스포켄이란 도시에서 살고 계셔서 잘 알지는 못하는 분이었지만 침상에 누워 계시는 모습을 뵈오니 내 어머님을 뵙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할 말이 없다. 간암으로 간을 이식하는 길밖에 없어 이식할 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간이 나타나 급히 수술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복 해 보았을 때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으면 이식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왠지 내 마음속에 하나의 확신이 왔다. 성탄절 아침에 이처럼 뜻하지 않게도 간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결코 우연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자와 맞는 살아 있는 사람의 골수 하나 구하기도 하늘의 별인데 자신이 죽어야만 줄 수 있는 간을 그것도 환자와 딱 맞는 것을 찾기는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는 상식적으로 아는 바다. 그래서 그것을 8개월 동안이나 기다려 왔는데 그렇게 귀한 것이 다른 날도 아닌 성탄절 아침에 나타났다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이와 같은 생각에 깊이 젖어 있는데 그 여 집사가 나의 팔을 이끌었다. 그녀를 따라 말없이 휴게실로 갔다. 한참이나 말이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던 그녀는 간신히 눈물 고인 눈을 들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요즘 저는 교회도 하나님도 아무런 흥미가 없어졌어요. 어머니께서 저렇게 간암으로 고생을 하시는데 얼마 전에는 또 아버지께서 폐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으셨어요.”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왜 우리들에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 겹으로 닥쳐오는 거지요?” 라고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속에는 그런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대답해 주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결코 뜻 없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것과 “이번 어머니의 수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그 누구도 고통 받는 현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한결 같이 다 싫어하고 진저리를 친다. 아들을 잃으신 우리 어머님께서도 그러하셨고, 목사인 나 또한 사랑하는 나의 좋으신 형님을 먼저 천국에 보내드리고 낯선 거리를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걸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만은 믿고 또 확신한다.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국의 식물학자 알프레도 러셀 윌리스는 연구실에서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황제나비를 관찰하고 있었다. 고치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나비에게 있어서는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힘든 문제였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비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윌리스는 순간 ‘내가 이 나비를 도우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칼로 고치의 옆 부분을 살짝 그었다. 그러자 예상 밖의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다. 나비는 고치를 쉽게 탈출해 나왔지만 날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잠시 후 축 늘어지더니만 죽고 말았다. 그 큰 몸이 그렇게도 작은 구멍으로 빠져 나오면서 겪어야 할 그 무서운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날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나비에게 있어서는 고치를 빠져 나오는 과정이 곧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힘든 고통을 통해서 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이처럼 힘겨운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육체를 제어하고 영혼을 되살리는 생명의 과정이 바로 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67,71)고 말이다.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고난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에 고난보다 더 큰 선물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준비 된 그릇에만 하늘의 복이 담기게 되기 때문이다. 욥이 그랬었고 사도 바울이 그랬으며 아브라함이 그랬었고 요셉이 또한 그랬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속 깊으신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고난에 대처하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가신 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면류관도 없는 것이다.”
가슴이 덜컹 내려 않는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차마 무슨 일인가? 하고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엔 십중팔구 좋지 않는 일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니 마음을 진정한 그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엄마가 지금 수술을 받으려고 하니 병원에 와서 기도 좀 해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모처럼 가족들이 성탄절을 맞아 집에서 함께 모이기로 되어 있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지만 허둥지둥 준비하고 워싱턴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침상 머리에 아들과 딸들 그리고 사위가 둥글게 모여 있었다. 자녀들은 이곳 시애틀에서 살고 있으나 부모님은 300마일쯤 멀리 떨어져 있는 스포켄이란 도시에서 살고 계셔서 잘 알지는 못하는 분이었지만 침상에 누워 계시는 모습을 뵈오니 내 어머님을 뵙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할 말이 없다. 간암으로 간을 이식하는 길밖에 없어 이식할 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간이 나타나 급히 수술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복 해 보았을 때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으면 이식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왠지 내 마음속에 하나의 확신이 왔다. 성탄절 아침에 이처럼 뜻하지 않게도 간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결코 우연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자와 맞는 살아 있는 사람의 골수 하나 구하기도 하늘의 별인데 자신이 죽어야만 줄 수 있는 간을 그것도 환자와 딱 맞는 것을 찾기는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는 상식적으로 아는 바다. 그래서 그것을 8개월 동안이나 기다려 왔는데 그렇게 귀한 것이 다른 날도 아닌 성탄절 아침에 나타났다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이와 같은 생각에 깊이 젖어 있는데 그 여 집사가 나의 팔을 이끌었다. 그녀를 따라 말없이 휴게실로 갔다. 한참이나 말이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던 그녀는 간신히 눈물 고인 눈을 들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요즘 저는 교회도 하나님도 아무런 흥미가 없어졌어요. 어머니께서 저렇게 간암으로 고생을 하시는데 얼마 전에는 또 아버지께서 폐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으셨어요.”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왜 우리들에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 겹으로 닥쳐오는 거지요?” 라고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속에는 그런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대답해 주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결코 뜻 없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것과 “이번 어머니의 수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그 누구도 고통 받는 현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한결 같이 다 싫어하고 진저리를 친다. 아들을 잃으신 우리 어머님께서도 그러하셨고, 목사인 나 또한 사랑하는 나의 좋으신 형님을 먼저 천국에 보내드리고 낯선 거리를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걸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만은 믿고 또 확신한다.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국의 식물학자 알프레도 러셀 윌리스는 연구실에서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황제나비를 관찰하고 있었다. 고치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나비에게 있어서는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힘든 문제였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비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윌리스는 순간 ‘내가 이 나비를 도우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칼로 고치의 옆 부분을 살짝 그었다. 그러자 예상 밖의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다. 나비는 고치를 쉽게 탈출해 나왔지만 날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잠시 후 축 늘어지더니만 죽고 말았다. 그 큰 몸이 그렇게도 작은 구멍으로 빠져 나오면서 겪어야 할 그 무서운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날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나비에게 있어서는 고치를 빠져 나오는 과정이 곧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힘든 고통을 통해서 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이처럼 힘겨운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육체를 제어하고 영혼을 되살리는 생명의 과정이 바로 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67,71)고 말이다.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고난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에 고난보다 더 큰 선물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준비 된 그릇에만 하늘의 복이 담기게 되기 때문이다. 욥이 그랬었고 사도 바울이 그랬으며 아브라함이 그랬었고 요셉이 또한 그랬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속 깊으신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고난에 대처하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가신 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면류관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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