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심양시 조선족 문학회 시집에 실린 아름다운 詩인데 작자는 미상이다. “강 건너 저기 저 마을에는 락조에 꼬물꼬물 피여 오르는 실연기 그리운 정 모락모락 일게하네 소학시절 한 책상에서 가지런히 공부하던 영란이 강 건너 가더니 영영 소식 없네 보조개 웃음만 사념에 꽃잎처럼 떠 있네 붉은 넥타이 날리며 눈길에서 너는 썰매 끌고 나는 삼태기에 소똥 줍고, 함게 파리잡고, 쥐도잡고, 벼이삭도 주었었지 개눈깔 사탕 한 알 사서 너 한입 나 한입 번갈아 빨아 먹기도 하고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 몰래 부엌걸이 훔쳐다 북데기에 숨어서 바꾼 엿을 재미나게 먹었지 그러던 네가 부모따라 강 건너 간후 물새의 울음소리가 왜 그리도 울적한지 몰랐네 강물결이 잠결에 왜 그리도 소용돌이쳤는지 모르네 바라보니 영란아, 석별한지도 어언간 50년 내가 백발이 되였으니 너도 꾀나 늙었겠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고 싶구나, 영란아 - 강물은 도도히 흘러 올 수 갈 수 없네 언제면 자유래왕할 수 있을런지? 오겠지, 살아 있다면 그날은 꼭 오겠지 그때 만나면 쪼골쪼골 늙은 우리 둘 카페에서 포도술에 추억을 적시며 밤새도록 예기 하자꾸나 이가 다 빠져 호물호물 몇날 몇칠을 얘기해도 못 다할 이야기 강건너 저기 저 마을에는 영란이가 있네 허리 꼬부라진 파파 늙은 할멈이라도 한 번 꼭 끌어 안고픈 소학시절의 예쁜 소녀, 영란이가 저 마을에 있네“

가슴이 찡하니 울리는 詩이다. 무지렁이라도 민족 분단의 아픔을 노래 하는 시인의 아픔을 알 것 같은 살가운 詩情이 흐른다. 그러나 詩心의 깊이는 이렇게 아픔만 간직하는 것은 아니다. 강건너 술 익는 마을이나, 섶다리 총총 건너 홍매화 피는 마을이나, 강건너 남촌애서 오는 늦봄이나 이런 모든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 시인의 할 일이다. 만약 강 건너 마을에 대해 보다 확실한 메시지를 詩化할 수 만 있다면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지 않고 강 건너 마을에 들어가 술 익는 항아리도 열어보고, 홍 매화 그늘을 걷기도 하며 늦장 봄에 화풀이도 할 것이며 그토록 그리던 영란이도 꼭 껴안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싱글을 자랑하는 어느 골퍼가 작은 소(沼)에만 오면 그만 볼을 물에 빠뜨리고는 하였다. 그의 골프메이트들은 이 홀에 오기만 하면 아! 저기 강이 있네! 하면서 그의 징크스를 부추기는 비신사적인 유희로 한 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앞에서 아 저기에 강이 있네 하면서 서성거리지 않았다. 텀벙 강에 발을 딛는 순간 강 건너 마을은 이미 열렸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 텀벙소리에 놀라 강건너 원주민이 이들에게 ‘강을 건넌 사람들’(히브리인)이란 별명을 부쳐 주었을까? 어차피 인생이란 수없는 강과 바다를 건너야 하는 순례자인 까닭에 강 건너 마을을 몽환속에 가두어 놓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