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이 되었던, 재혼이 되었던 두 남녀가 서로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서로 엄청 사랑하고 있다는 객관적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돌아가는 세상일들을 바라보노라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생의 씁쓸한 맛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언제는 좋아서 세인의 관심을 끌며 결혼을 했다가 어느새 이혼을 하고 서로 상대를 위해 비난하는 모습들은 추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아름다움도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고 부귀영화도 예외가 아닐진대 오히려 인생의 어리석은 모습만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하기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무슨 그리 고상함을 지니고 있을까? 성경 속에 나타나는 한 부부의 모습만 보아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 자기의 아내가 남의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되어도 개의치 않았던 사람들이 히브리 민족의 지주와도 같았던 아브라함이었으니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무엘상에 나타나는 엘가나라는 멋진 남자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아내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해 날마다 식음을 전폐하고 엄청난 고통 가운데 빠져 있을 때 한나에게 이렇게 다가선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1:8)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자상하고 멋진 남편의 모습인가? 하지만 그는 이미 이처럼 자식을 낳지 못해 고통하는 한나를 두고 다른 여자를 통해 자식을 보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 다른 여자 브닌나 때문에 한나가 그토록 먹지도 못한 채 눈물짓고 있는데도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고 반문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이것이 진정 이 세상의 사랑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비극과 희극의 중심에는 사람의 사랑이 있다. 그걸 빼놓고는 문학이 안 되는 모양이다. 최근에 TV를 통해 방송되는 드라마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빼놓고는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게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라도 그 허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利己(이기)로 가득차 있는 사랑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는 사랑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래도 나와 우리들의 사랑만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가 얼마나 인생의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하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기초가 없는 사랑은 그 자체가 허무요 자기중심의 이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한나는 자칭 “열 아들 보다 낫다”는 남편의 사랑을 등 뒤에 두고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유명한 사무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실로 한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모델로 성경 속에 남아 있다. 그녀는 실로 가슴에 저미는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었고 그 해결책을 통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여인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녀를 통해 진정한 삶의 기쁨과 소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이란 과연 무엇인가?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매달리며 호소하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은 반드시 만나 주신다(잠8:17). 입으로는 열 아들 보다 낫다고 해 놓고서도 실상은 다른 여인을 통해 자식을 두는 엘가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과는 사랑을 하지 말고 그렇게 한나와 같이 하나님만 찾으며 살아야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을 사랑하되 그 내면에 분명히 살아 있는 이기를 알고 사랑하면 된다. 그래야만 한나와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 보다 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큰 보람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는 좋아서 세인의 관심을 끌며 결혼을 했다가 어느새 이혼을 하고 서로 상대를 위해 비난하는 모습들은 추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아름다움도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고 부귀영화도 예외가 아닐진대 오히려 인생의 어리석은 모습만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하기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무슨 그리 고상함을 지니고 있을까? 성경 속에 나타나는 한 부부의 모습만 보아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 자기의 아내가 남의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되어도 개의치 않았던 사람들이 히브리 민족의 지주와도 같았던 아브라함이었으니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무엘상에 나타나는 엘가나라는 멋진 남자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아내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해 날마다 식음을 전폐하고 엄청난 고통 가운데 빠져 있을 때 한나에게 이렇게 다가선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1:8)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자상하고 멋진 남편의 모습인가? 하지만 그는 이미 이처럼 자식을 낳지 못해 고통하는 한나를 두고 다른 여자를 통해 자식을 보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 다른 여자 브닌나 때문에 한나가 그토록 먹지도 못한 채 눈물짓고 있는데도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고 반문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이것이 진정 이 세상의 사랑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비극과 희극의 중심에는 사람의 사랑이 있다. 그걸 빼놓고는 문학이 안 되는 모양이다. 최근에 TV를 통해 방송되는 드라마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빼놓고는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게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라도 그 허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利己(이기)로 가득차 있는 사랑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는 사랑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래도 나와 우리들의 사랑만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가 얼마나 인생의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하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기초가 없는 사랑은 그 자체가 허무요 자기중심의 이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한나는 자칭 “열 아들 보다 낫다”는 남편의 사랑을 등 뒤에 두고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유명한 사무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실로 한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모델로 성경 속에 남아 있다. 그녀는 실로 가슴에 저미는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었고 그 해결책을 통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여인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녀를 통해 진정한 삶의 기쁨과 소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이란 과연 무엇인가?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매달리며 호소하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은 반드시 만나 주신다(잠8:17). 입으로는 열 아들 보다 낫다고 해 놓고서도 실상은 다른 여인을 통해 자식을 두는 엘가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과는 사랑을 하지 말고 그렇게 한나와 같이 하나님만 찾으며 살아야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을 사랑하되 그 내면에 분명히 살아 있는 이기를 알고 사랑하면 된다. 그래야만 한나와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 보다 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큰 보람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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