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린 시절 이미자 씨의 노래를 좋아했다. 그 때는 놀이 문화가 없던 때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어린 가슴에도 하나의 낙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줄 곳 이미자 씨의 노래를 라디오에서 많이 들었다. ‘황포돗대, 님이라 부르리까, 섬마을 선생님…….’ 등등. 그 중에서도 “인생은 나그네 인생길을 홀로 갈 머나먼 길”이라는 노랫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인생은 그렇게도 홀로 갈 머나먼 길이었던가? 사실 신앙과 내세의 소망이 없는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누가 저무는 인생과 함께 해주며 누가 떠나는 인생길에 동행을 해준단 말인가? 끝까지 홀로 울고 홀로 몸부림치다가 끝내는 홀로 떠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신앙이 있고 구원받은 믿음이 있다면 결코 인생은 홀로 갈 머나먼 길이 아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 주님과 함께 살고 이 세상 떠날 때도 주님과 함께 천당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름 날 밤 마당에서 모깃불 피워 놓고 멍석에 들어 누워 옛날이야기 듣다가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포근한 방에 있음을 발견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가? 마당에서 잠든 나를 어머니께서 방에 안고 가 뉘어 주시고 홑이불을 덮어 편히 잠자게 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던가? 꼭 같은 원리이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잠들고 천국에서 눈뜨는 것이다. 그것이 소위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무서워하는 기독교적 죽음에 대한 정의라고 한다면 독선이라고 또 비난할까? 하기야 상관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하신 진리 중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래서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우리들의 삶의 가치도 거기에 부응하는 멋지고 변화된 것이어야 하겠다. 인생이 진정 그렇게 끝나고 천국으로 가서 영원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욕심에 사로 잡혀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않을까? 오래 전 LA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상하고 재산이 불에 탄 끔찍한 역사가 있었다. 아마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이민 사회가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사실도 죄송하지만 거의 다 아는 사실이다. 왜 그런 일이 생겨났을까? “한국 사람은 돈 밖에 모른다.”는 인식이 모든 흑인들과 미 주류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 가장 무서운 그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흑인들이 밀집된 그들 속에서 3년만 사고 당하지 않고 돈을 벌면 평생 살밑천을 잡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만큼 흑인들은 주머니에 돈을 넣어 놓고 살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 속에서 장사를 하면 그들의 특성적 습성으로 인해 돈을 다 끌어내고 큰 부자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로부터 돈을 벌면서도 그들을 위해 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가난하고 구질구질한데 그 속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한국인들은 고급 승용차에 고급 주택에 잘만 사니 그들의 눈이 그만 뒤집혀져 버렸던 것이다.

이는 지금 한국에도 거의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서울의 노른자위인 강남이 그 실례다. 지금 강남은 치안부재 현상으로 모두가 벌벌 떨고 있다. 강남 롯데 백화점 맞은편 모 아파트에 사는 김 모 씨(31세)는 “무서워 못살겠어요. 그나마 아파트라 다행이지만 우리 집에 도적이 들지 않을까 걱정 되 밤잠을 설쳐요. 요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범행이 일어나니 집밖으로 나가는 것도 겁나죠. 단지 강남에 사는 게 무슨 죄라고 범행리스트에 올라가야 하나요?”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강남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범죄들은 이루 지면에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다. 백주 대로에서 등교하던 여고생이 납치되고, 길을 가던 가정주부가 납치되는 등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왜 이와 같은 놀라운 살인과 납치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것도 강남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 네티즌이 “있는 자가 조금만 나누고 살아도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라고 올린 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부의 불균형과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무서운 괴리 현상이 결국 이처럼 무서운 강력 사건을 유발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끔찍한 사건들이 하나같이 미궁으로 빠지고 범인이 검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한번뿐인 허망한 인생을 후회 없이 멋지게 살 수 있을까?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는 일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생각하고 배운 자는 못 배운 자를 생각하며 건강한 자는 병든 자를 생각하며, 그렇게만 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살맛이 나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이와는 거리가 멀다. 참으로 서울과 LA를 가보면 상대적 박탈감에 삶의 의욕이 식어지는 것을 솔직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런 분위기 속에도 숱한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있을 것인데 그 어디에서도 믿는 자와 같은 모습은 볼 수가 없으니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교회당 안에서만 믿는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라면 이 마지막 때에 교회는 진정 직무 유기의 본산지가 아니겠는가? 어느 목사님의 글에 얼굴을 붉혔던 일이 있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몇 안 되는 동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데 그들은 새벽 기도에 나가는 사람들을 그렇게도 싫어한단다. 이유인즉슨 매일 새벽마다 동네가 시끄럽도록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하는 그 사람들이 동네에서 가장 인심이 사납고 성격이 모가 나며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이 얼마나 기가 찬 노릇인가?

인생은 더불어 사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는데 더불어 살기에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이른 새벽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은 빈손으로 갈 것인데 조금만 더 인심을 써서 나누며 산다면 천국이 비단 하늘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인데……. 우리 모두 그런 천국을 만들어 가는 작은 모퉁이 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길은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의 소중한 자랑거리들을 배설물과 같이 포기하고 더불어 손을 펴서 나누는데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