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작곡가는 림스키코르사코프/차이콥스키/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라흐마니노프등이다. 그중에도 라흐마니노프는 아내와 내가 차이곱스키보다 더 좋아한다. 특히 그의 피아노협주곡 2번이 F.M에서 흘러나오면 몰던 차도 잠시 멈추고 다 듣고 싶을 정도이다.

1악장 도입부의 아디지오는 그 웅장함에 있어 그 어떤 교향곡도 흉내 낼수 없는 장엄함이 있다. 뒤따르는 현의 선율은 다만 피아노를 위한 시녀일 뿐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귀화하였지만 그의 음악색깔은 영원히 러시아의 음울한 회색빛 명암의 어둠속에 침전되어 있다.

인간 그 영원한 고독을 오선지에 그처럼 잘 담아낸 작곡가는 일찍이 없다고 생각된다. 내가 그에게 심취하게 된 동기는 극동방송국 음악담당 프로듀서였던 김미정씨가 건네준 릴 테이프에 담긴 라흐마니노프의 모음곡으로 부터 이루어졌다. 때마침 큰 동서의 릴테잎 레코더의 분양으로 한층 클래식 감상에 도취하여 있을 때였다.

사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 보다는 피아노 연주가로 더욱 명망이 높았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는데 사실 그의 곡들은 연주가들에게 최상의 기교를 요구할 뿐아니라 잠시도 쉴틈을 주지않고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곡들이다.

그런데 2번을 쓰게된 동기는 이렇다. 1987년에 작곡한 교향곡 1번이 초연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혹독하게 비판해댔다. 그후 라흐마니노프는 실의에 빠져 우울증을 수년 동안 앓게 되었다. 그는 ‘니콜라이 달’이란 심리치료사의 간호 끝에 병마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고 그후 작곡한 것이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니콜라이 달’은 그에게 '암시 요법'으로 매일 그에게 어떤 암시를 주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 될 것이다."라는 반복되는 암시 덕분에 라흐마니노프가 다시 펜을 들어 제 2번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곡은 긴장과 이완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곡의 구성으로 음악치료사들이 우울증환자들에게 즐겨 권하는 치료곡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음악으로도 자주 이용되는 친숙한 곡이다. 일본의 고상한 만화 음악 영화 ‘노다메칸타빌레’에서 치아키의 연주는 페러디이기는 하지만 매우 고급스런 연주을 흉내 내므로 여주인공 노다메를 감동시킨다. 특히 과장된 지휘자의 솜씨는 압권이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를 가장 잘 표현한 영화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라프소디’이다. 아내와 연애시절 보았던 가장 감동적인 명화여서인지 아직도 그 여운은 진하게 남아있다. 자작나무숲에 소리없이 내리는 함박눈 세례속에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감상한다고 생각해 보라! 우울은 벌써 십리밖으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첫눈 오는날 나는 반드시 라흐마니노프를 틀어 놓고 러시아의 광활한 자작나무숲을 상상여행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