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 이후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의 권력승계 과정이 진행되고 일면 외형적으로는 안정화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까지 김정일의 권력공백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 새롭고 거대한 변화의 움직임이 분명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김정일 사후 우리 사회의 대처 모습이 어떠했는지 한번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가와 일부 시민단체에서 조문 분향소를 설치하는가 하면, 이른바 조문 논쟁으로 여야가 갈라지고 극도의 이념논쟁으로 또다시 남남갈등이 재연되었다. 일각에서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책임자인 김정일이 사망했기 때문에 남북관계를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욱이 교계에서는 이른바 “원수도 사랑하라”는 메시지에 근거하여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포용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요구는 남북관계의 발전적 개선보다는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남남갈등을 조장하고 대남비난에 대한 빌미를 제공한 면도 없지 않다. 특히 사랑과 공의라는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도 무조건적으로 북한을 포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냉철하게 북한 주민과 정권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김정일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기를 겪는 동안 30만에서 300만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을 아사 상태로 방치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들은 영양부족과 굶주림으로 평균 5cm 정도 신체 발육상태가 낮다고 한다. 이들과 같은 세대인 김정은은 과연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어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았을까. 개인의 권력유지를 위해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북한 정권을 향해 조문을 하고 다시 3대 세습의 안정을 바란다는 내용은 과연 우리의 종교적 양심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어찌 히틀러 한 사람에게만 전가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김정일이 사망했다고 그가 저지른 모든 사건들을 역사에 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현재 북한정권은 선거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 정부가 아니라, 세습을 통해 유훈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이전 통치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갑작스러운 대북정책 변화 촉구보다는 북한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북한의 안정이 아니라 변화를 강력히 요구할 때다. 남북간 화해를 통한 상생의 길이 열려 있음을 강조하되 그 조건은 북한의 변화임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한번 고난의 행군기와 같이 북한 주민들의 아사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억압과 폭정의 강도를 높이지 못하도록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체제 결속을 위해 군사적 긴장도를 높이고, 국경통제를 위해 탈북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북한정권과는 더 이상 한반도의 미래를 함께 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에 과연 한국교회가 원수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통해 김정일의 역사를 묻으려 한다면 이는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고립된 종교, 비난의 종교가 될 것이다.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는 지금, 교계는 남북한 주민들 모두의 아픔을 치유하고 한반도의 통일 미래를 제시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북한 민주화와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눈물의 기도소리가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모두의 손을 맞잡아야 할 때다. 북한정권 뒤에 가려져 있는 북한 주민들의 아래로부터의 변화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재 정권에서 고통 받으며 절규하는 북한 주민들이 훗날 역사의 뒤안길에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과연 어떠한 평가를 할지 한번쯤 뒤돌아보자. 억압과 폭정의 종식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했던 남한의 크리스천들이 있었음을 그들이 기억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강동완 교수(동아대 정치외교학과, 전 통일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