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이 발달하고 기계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인간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또래 친구들과 더불어 소꿉장난하며 놀았던 우리 기성세대들의 어린 시절과 오늘의 어린이들을 비교해 본다면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나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TV도 없었으며 전화조차도 없었다.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하였다. 시냇가에서 멱을 감을 때도 소먹이며 전쟁놀이를 할 때도 언제나 주위에는 또래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함께 뒹굴고 함께 웃으며 그렇게 한데 어우러져 인생을 배워 갔다. 그러나 오늘날 어린이들은 누구와 함께 하는가? 컴퓨터에서 인터넷을 통해 말없이 기계와 함께 놀고 작은 셀 폰을 들고 사진을 찍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마스코트와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바보상자로 불리는 TV를 친구로 삼고 지낸다. 함께 만나고 공부하는 친구들은 이제 더 이상의 친구가 아니라 삶의 경쟁자에 불과하다. 친구 보다 한두 군데 더 학원에 나가는 자신을 대견해 하고 친구와 다른 차별화를 느끼며 자라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자연히 감정이 메마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물 흐르듯 평안치 못하게 되고 자신과 맞지 않으면 원수가 되고 미움의 대상이 된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사귐을 가지며 살아야 하는데 그와 같은 생활에 적응이 잘되지 않으니 인생이 외롭고 허무해지는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적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게 되고 미움과 원망으로 인생이 일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작게는 가정에서 비롯되어 부부가 갈라지고 부모 자식의 복된 관계가 흐트러지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끼리도 원수가 되고 만다. 이처럼 불거지기 시작한 인간관계는 결국 직장과 사회와 국가까지 확대되어 결국은 전쟁이라는 엄청난 참상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좋은 친구나 인간관계를 누리며 사는 것은 그야말로 천국을 소유함과 같이 소중한 것이다. 남을 미워하며 사는 것은 그만큼 자신도 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미운 자를 품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특별한 길은 없는 것일까? 성경 사무엘상을 조용히 읽어보노라면 놀라운 한 가지의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성군 다윗의 삶이 우리들에게 좋은 한 모델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나라를 위하고 또 나아가서는 사울이라는 왕을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것이 공연한 미움과 시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골리앗을 무찌르고 그 잔인하고 무서운 블레셋과 전쟁하여 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전쟁터에서 개선하는 그를 향하여 여인들이 춤을 추며 환영하기를, “사울은 천헐, 다윗은 만만”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그만 사울 왕의 미움을 사고 말았던 것이다. ‘다윗에게 더 많은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의 소리는 결국 다윗이 왕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고 대노한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게 된다. 이때부터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는데 자신을 죽이려고 3천명의 정예 된 군사를 이끌고 따르는 사울을 피해 손바닥만 한 이스라엘 땅을 피해 다니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 제사장을 방문하여 진설병을 얻어먹기도 하였고 때로는 적군의 왕을 찾아가 미친 척 하며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千辛萬苦(천신만고)의 삶을 지속해 가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사울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천운의 기회를 맞아 자신의 적장인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씩이나 맞았지만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 이유는 그가 자신의 원수기이는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일이므로 사양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을 죽이면 자신의 삶이 그 엄청난 곳에서부터 해방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평안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생각했던 다윗의 이와 같은 자세는 참으로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악한 사울을 버리시는 것을 보았고 그처럼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지키심으로 생명을 보존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훗날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말씀으로 남겼으니 바로 로마서 12장 19절의 말씀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는 말씀 말이다.

그렇다. 원수를 내가 갚으면 허무하기만 하다. 그래서 시애틀에서 발생한 그린 리버의 살인마(그는 무려 48명의 여인을 살해하였다)가 형을 선고받을 때 어떤 가족들은 그의 사형을 반대하였다. 저렇게도 잔인한 인간은 순간에 고통 없이 죽이지 말고 오랜 세월 감옥 속에서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받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고통을 받는다고 피해자가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리려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고 다윗처럼 초연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며 선하게, 그와 같은 악한 삶을 거울로 삼아 선하게 살아간다면 더욱 그 삶이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악을 선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잔인한 인생들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다루시고 인도하시는가를 바라보는 것도 삶의 즐거운 한 낙이 될 것이기에 말이다. 먹을 것이 너무나도 풍부한 뉴질랜들 에서는 새는 새로되 날지 못하는 새들이 다섯 종류가 넘는다고 한다. 맹수도 뱀도 악한 짐승도 없는 그곳에서는 날아다니며 먹이를 구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미운자도 우리들의 삶을 긴장케 하고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출세하고 성공해야 하겠기에 더욱 삶을 분발하게 된다면 그 원수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세상에서 둘도 없이 소중한 삶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