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림절 기간으로 아기 예수의 나심을 기다리는 절기다. 기다림은 성질상 희망적이다. 더 나쁜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기다림은 본질상 미래적인 것이다. 미래적인 것이면서도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미래적 가짐의 현재적 가불'이다. 30분 후에 약속장소 앞에서 애인을 만나기로 했다 하자. 만남은 30분 후에 이루어질 것이니 미래적인 것이지만 지금 내가 약속장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으니 미래는 현재의 발걸음을 방향 짓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언제나 현재에 실효적으로 존재한다.

겨울 나무는 앙상하여 멋 없지만 화려한 봄이 올 것을 기다리며, 생명력을 그 몸 안으로 다시 비축하고 있다. 겨울나무야 슬퍼 말아라! 기다림에는 언제나 위로가 있다. 생명을 가진 것에는 누구에게나 겨울이 온다. 다만 겨울에 죽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봄의 나뭇가지에는 꽃 있네
여름 나뭇가지에는 잎 있네
가을 나뭇가지에는 열매 있네
겨울 가지에는 위로 있네

꽃이 져버린 다음
잎이 떨어진 다음
열매가 다 사라진 다음에
가지에 싹이 돋는다.
아아 괴로움에 지친 이여!
아아 불행을 짊어진 이여!
아아 소망을 잃은 이여!
봄볕이 쬐일 날은 멀잖다.

봄의 나뭇가지에는 꽃 있네
여름 나뭇가지에는 잎 있네
가을 나뭇가지에는 열매 있네
겨울 가지에는 위로 있네 (우찌무라 간조)

나는 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들아! 공책에 쓴 글씨는 지울 수 있지. 돌 비석에 새긴 업적도 지울 수 있지. 그러나 누가 능히 '내일을 사는 자'를 명하여 그 가슴속의 희망을 지울 수 있느냐? 정의도 나쁜 것으로 선전할 수 있지.

그러나 누가 능히 헤롯을 시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막을 수 있느냐?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마2:20~21) 결국 성탄(인류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짓밟으려 했던 자들의 최후가 어떠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탄의 의미를 가로채거나 막아서지 않도록 교회와 성도들의 각성이 많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