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속담에 “커피는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고 사랑처럼 달콤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커피 없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아마 물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가 커피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1년에 4조잔 분량이 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소비량이다. 에디오피가 원산지인 커피는 16 세기 남미로 건너간 이후 전 세계인이 줄기는 음료가 되었다.

세계의 남반부 기후 지역에서 생산되는 커피들 중에 커피 애호가들이 가장 비싸게 치는 커피가 루왁 커피다. 이 커피는 전 세계에서 딱 한군데서 생산되는데 바로 인도네시아의 자바에서 나는 커피다.

*루왁(Luwak)은 인도네시아어로 사향고양이를 의미하는데 루왁커피를 만드는데 이 동물이 꼭 필요하다. 크기가 여우만한 이 사향고양이는 몽구스과에 속한 종인데 주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으로 과일을 주식으로 한다. 루왁은 수마트라 섬에서 재배하는 잘 익은 최상의 커피 열매를 먹고 산다. 그것도 잘 익은 것만 골라 먹는다. 그런 다음 이 사향고양이는 과육은 소화시키고 커피 씨는 소화되지 않는 채 배설한다. 이곳 주민들은 열대우림과 강둑을 뒤져 사향고양이 배설물을 찾아낸다. 그리고 콩만 남을 때까지 배설물을 씻어내고 햇빛에 잘 말려 그 유명한 루왁 커피를 생산해 낸다.

이렇게 생산된 루왁 커피가 한해 약 450kg 정도가 된다. 그 양이 한정되다보니 그 가격이 1 파운드당 300불선이라고 하니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금가루를 마시는 것과 같다. 현재는 워낙 비싸게 팔리다 보니 원주민들이 사향고양이를 직접 길러 그 량을 늘려 더 많은 루왁 커리를 생산한다고 한다. 어쨌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값 비싼 루왁 커피는 사향고양이의 배설물(똥)에서 나온다.

*꿀(honey)은 꽃의 밀선(꿀샘)에서 나오는 즙(nectary, honey gland)으로 꽃은 수분을 이루기 위해서 꿀샘을 미끼로 벌이나 나비를 끌어들인다. 고형분의 대부분은 당분으로(83%), 거의 같은 양의 과당(fruit sugar, fructose, levulose)과 포도당(grape sugar, glucose)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수크로오즈(sucrose)는 약 2%가 들어 있다. 꿀벌은 이 수크로오즈를 자기 입으로부터 나오는 전화효소의 작용으로 전화당과 과당 포도당으로 변화시켜 단당류인 꿀을 만든다.

꿀벌들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약 560만개의 꽃을 찾는다고 하는데 꿀의 효능은 피로회복, 빈혈, 간장병예방 및 치료, 당뇨병의 당원 공급, 숙취해소, 살균효과, 등 과히 천연종합 영양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효능이 뛰어난 꿀도 꿀벌의 입으로 부터 분비된 분비물임에 틀림없다.

*포도로 만드는 포도주는 이스트라는 효묘균이 포도즙을 먹고 대신 알코올을 배설하는데 이 배설물의 량이 많아지면 알코올이 효모균인 이스트를 죽인다. 이것을 숙성이라고 한다. 결국 알코올에 의해 죽은 효모균이 썩어서 나온 물이 와인이다. 좋은 와인이란 효모균의 시체가 얼마나 적당히 쌓여있는가에 달려 있다.

*옛날 여성들이 몸단장을 위해 바른 하얀 분가루는 그 원료가 광부들이 갱로에 가스가 얼마나 찼는지를 알기 위해 데리고 갔던 새, 나이팅게일의 배설물이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마구간이다. 마구간은 동물의 배설물로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다. 시골에서 소를 키우는 외양간의 거름을 내 본사람이면 다 알 것이지만 그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셨고 이스라엘 지방 중에서도 가장 낙후 지역인 나사렛에서 자랐고 소외계층이 가장 많이 사는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셨고 피비린내가 나는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다.

배설물 냄새로 숨쉬기조차 힘든 곳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온갖 인류의 냄새나고 더러운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가장 더러운 곳에서 태어나시고 죄인 중에 괴수들만 골라 죽이는 골고다에서 죽으셨다. 당신의 뜻을 버리시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배설물이 오히려 중요한 가치를 창출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장 존귀한 자리에 앉히셨다.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인 앙시앙 레짐 하에서의 유럽은 세 가지 계충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 1신분은 성직자, 제 2신분은 귀족, 제 3신분은 평민으로 왕은 신분을 초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1신분인 성직자 신분은 무소불위의 신분으로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분이 보장된 계급이었다.
이렇게 성직자의 신분이 가장 존귀함을 받던 때 교회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

이러던 계급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그 구별은 뚜렷하지 않지만 두가지 계급으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무산자 계급인 플로레타리아와 자본가를 의미하는 부르조아계층이다.

부르조아(bourgeois)는 불어로 성(城)을 의미하는 bourg에서 유래한 단어로 부를 축적하여 성안에서 살고 있는 부로 권력을 사용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또한 영세 상인이나 노동자 등민중 계층과 성직자와 왕족, 귀족 계층사이에 제 3의 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민중과는 달리 재산과 학식을 갖고 있지만 성직자나 왕족 등 기득권층의 권력을 갖지 못하고 돈으로 권력을 사 자신들의 욕구나 이득을 챙기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반면에 플로레타리아(proletariat)계급은 사회적으로 하위계층을 일컫는데 무산계급(無産階級)이라고도 한다. 원래 의미는 로마제국 당시 군에 입대시킬 자신의 아들(라틴어로 proles,,자식)외에는 부를 소유하지 못하는 무산계급자들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마르크스가 사회학적인 용어로 사용하였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로레타리아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살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임금노동자”라고 했고 이들은 기득권이 없어 성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때의 성직자는 어느 부류에 속했을까?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구교에 핍박 받고 이리 저리 쫒겨 다닐때 올바로 된 개신교 성직자들은 목숨을 걸고 구교에 맞서야만 했다. 이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불렀고 불란서의 위그르를 시작으로 스위스의 장로교 영국의 감리교 등을 통하여 기독교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게 된다. 그 밑거름은 성직자들이 탄압받을 때였고 성안에서 편히 사는 부르조아지로 남기 보다는 성밖의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살 때였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원래 인도 용어로는 색(color)를 나타내는 바르나(Varna)로 부르는데 인도와 항해 무역을 하던 푸르투갈과 스페인이 푸루투갈어인 카스타(casta)로 사용하면서 카스트제도로 알려졌다. 이 제도는 4계층으로 나뉘는데 성직자와 학자 부류를 브라만 계층, 왕족이나 귀족, 장교, 경찰관들을 크샤트리아, 생산활동과 관련된 일에 중사하는 바이샤, 그리고 육체노동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수드라가 있다. 이 제도의 원래 목적은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각각의 일을 전문적으로 맡아서 하게 하여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순수한 목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뚯이 변질되어 사회적 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카스트 제도에 들지 못하는 계층이 있는데 카스트 아래의 카스트 계층으로 불가촉 천민으로 불리는 파리아(Paraiyar)이다. 이들은 악의 구현으로 악마, 악귀 등 사회적 악으로 간주하여 다른 계층의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보통 힘든 일을 하거나 짐승을 잡는 일, 시체를 다루는 일,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등을 맡아 인도에서도 최악의 차별대우를 받고 산다.

만일 예수님이 인도에 가신다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로 가셨을까?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남의 나라 땅 애굽으로 피신하셨다가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에서 사시다가 공생애의 시작을 무식한 어부들이 모여사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것을 보면 분명히 카스트 계급으로가 아니라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파리아들을 위해 사셨을 것이고 부르조아들이 사는 성안에서 보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사는 성밖으로 가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길은 the worst에서 the best로 가는 길이었는데 오늘 날의 우리 성직자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종교가 세속에 발을 들여 좋는 순간 그 본질을 잃게 된다. 과거 성직자가 세속에 물들어 있을 때 세상도 종교도 다 썩게 만든 암흑의 세계였다. 지난 300여년간 기독교는 세상과 구별하기 위해 몸부림 치던 시대였고 그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했고 기독교는 세계 선교에 기치를 들 수 있었다.

십자가의 길이 The Worst에서 The Best로 가는 길이라면 우리 목회자가 세상에 너무 깊숙히 발을 들여 놓고 건너지 못할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아닌지?
이제 너무 세상에서 the best 만 추구하다 the worst의 소중한 가치를 잃고 살지는 않는지?
그동안 우리가 무시하고 소홀했던 십자가의 소중한 가치를 버리고 십자가를 만든 재료에 너무 큰 가치를 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루왁 커피가 왜 가장 비싼 커피가 되었는지?
고급 포도주의 값이 비싼 이유가 무엇인지?
꿀이 왜 인체에 그렇게 이로운 것인지?
왜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시작하셨는지?

또 한번의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시는 성탄을 맞아하면서 the worst의 소중함을 되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