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코미디 프로그램 중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콘서트”의 “애정남”이란 프로가 있습니다. 만약 “애정남”이란 말을 듣고 무슨 사랑하는 남자를 연상한다면 그 사람은 요즘 흐르는 방송문화에 많이 뒤쳐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애정남’이란 “애매한 것을 정리해 주는 남자”의 준말인데,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결정하거나 선택하기에 애매한 문제들을 소재로 삼아 재미있는 코미디 형식으로 답변해서 정리해주는데 그냥 한번 웃어넘기는 코미디 이상으로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받고 있고, 게다가 그 대답들이 상당한 설득력도 있어서 요즘 적지 않은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 프로그램에서 ‘국회위원은 과연 누구냐’라는 소재를 가지고 재미있게 정리를 했는데 그로 인해 현직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프로그램에서 애정남 역을 맡은 개그맨 최효종 씨를 고발하겠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할 정도로 요즘 이 프로그램이 미치는 영향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 정도입니다.
사람들이 이 “애정남”을 좋아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한 거 같습니다. 어떤 이는 애정남 역할을 맡은 개그맨의 말투가 너무 재미있어서 좋아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문제를 풀어가는 어법이나 제시하는 해법이 너무 기발해서 좋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소에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문제 중에는 ‘이것이다’, 아니면 ‘저것이다’라고 정하기가 매우 애매한 것들이 많은데 그런 문제들을 잘 정리해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식에 갈 적마다 축의금을 얼마나 가지고 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게 아주 애매한데 애정남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합니다. “일단 축의금은 3만원은 택시로 치면 기본요금이다. 그런데 3만원과 5만원을 구분하는 것이 애매하다”며, “4,5,6,9월 등 결혼 성수기에 결혼하면 3만원, 비수기에 결혼하면 5만원이다”고 하면서, “왜냐하면 성수기에는 돈이 많이 나간다. 이걸 결혼하는 사람들이 이해해줘야 한다”고 하고, “5만원 받고 싶으면 비수기에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5만원과 10만원이 또 애매한데, 결혼하는 친구의 부모님이 내 이름을 알면 10만원, 모르면 5만원을 하라”… 뭐 이런 식으로 살면서 정하기 애매한 것들을 재미있게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설득력도 있게 정해 주니까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사실 살면서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지 애매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또는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해서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은 경우가 참 많습니다. 게다가 어떤 문제들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지를 잘 알면서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결정을 못하는 이유는 정말 어떻게 결정해야 좋은지를 몰라서 일수도 있지만 아마도 많은 경우는 무언가를 결정하면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으로 인해 감당해야할 책임으로부터 피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문제를 누군가가 정리를 해주면 적어도 그 결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책임을 내가 다 짊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애매한 문제들은 누군가 가 정리를 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지 몰라 애매한 경우는 사회생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맞닿게 되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애매한 경우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정의의 문제나, 사랑과 미움이 맞서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의로운 삶이라는 것에 대해 분명하고, 또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해야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애매하거나, 미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랑해야 하는지가 애매해서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애매할 때는 사랑과 정의가 맞서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랑과 정의는 모두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그 두 가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만큼 소중한데 그러기에 이 두가지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정하기는 매우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택하면 정의가 소멸되기 쉽고, 또 정의를 택하면 사랑이 없어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할 때 우리에게 악한 모습으로 맞서거나, 미운 모습으로 다가서지 않고, 사랑을 주장할 때는 정의로운 모습으로, 정의를 외칠 때에는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 와서 사랑에는 정의로 치고, 정의에는 사랑으로 맞서게 합니다. 그렇게 맞서게 하므로 사랑과 정의가 모두 상처를 입게 하거나 아니면 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그냥 침묵하며 좌시하게 만들므로 사랑과 정의를 분산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애매할 때 해야 할 것은 서로를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대적하거나, 그냥 침묵하며 좌시하기 보다는 사랑과 정의를 온전하게 아우르시는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정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이 “애정남”을 좋아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한 거 같습니다. 어떤 이는 애정남 역할을 맡은 개그맨의 말투가 너무 재미있어서 좋아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문제를 풀어가는 어법이나 제시하는 해법이 너무 기발해서 좋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소에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문제 중에는 ‘이것이다’, 아니면 ‘저것이다’라고 정하기가 매우 애매한 것들이 많은데 그런 문제들을 잘 정리해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식에 갈 적마다 축의금을 얼마나 가지고 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게 아주 애매한데 애정남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합니다. “일단 축의금은 3만원은 택시로 치면 기본요금이다. 그런데 3만원과 5만원을 구분하는 것이 애매하다”며, “4,5,6,9월 등 결혼 성수기에 결혼하면 3만원, 비수기에 결혼하면 5만원이다”고 하면서, “왜냐하면 성수기에는 돈이 많이 나간다. 이걸 결혼하는 사람들이 이해해줘야 한다”고 하고, “5만원 받고 싶으면 비수기에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5만원과 10만원이 또 애매한데, 결혼하는 친구의 부모님이 내 이름을 알면 10만원, 모르면 5만원을 하라”… 뭐 이런 식으로 살면서 정하기 애매한 것들을 재미있게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설득력도 있게 정해 주니까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사실 살면서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지 애매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또는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해서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은 경우가 참 많습니다. 게다가 어떤 문제들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지를 잘 알면서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결정을 못하는 이유는 정말 어떻게 결정해야 좋은지를 몰라서 일수도 있지만 아마도 많은 경우는 무언가를 결정하면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으로 인해 감당해야할 책임으로부터 피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문제를 누군가가 정리를 해주면 적어도 그 결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책임을 내가 다 짊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애매한 문제들은 누군가 가 정리를 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지 몰라 애매한 경우는 사회생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맞닿게 되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애매한 경우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정의의 문제나, 사랑과 미움이 맞서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의로운 삶이라는 것에 대해 분명하고, 또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해야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애매하거나, 미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랑해야 하는지가 애매해서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애매할 때는 사랑과 정의가 맞서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랑과 정의는 모두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그 두 가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만큼 소중한데 그러기에 이 두가지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정하기는 매우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택하면 정의가 소멸되기 쉽고, 또 정의를 택하면 사랑이 없어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할 때 우리에게 악한 모습으로 맞서거나, 미운 모습으로 다가서지 않고, 사랑을 주장할 때는 정의로운 모습으로, 정의를 외칠 때에는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 와서 사랑에는 정의로 치고, 정의에는 사랑으로 맞서게 합니다. 그렇게 맞서게 하므로 사랑과 정의가 모두 상처를 입게 하거나 아니면 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그냥 침묵하며 좌시하게 만들므로 사랑과 정의를 분산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애매할 때 해야 할 것은 서로를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대적하거나, 그냥 침묵하며 좌시하기 보다는 사랑과 정의를 온전하게 아우르시는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정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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