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연못에 금붕어 두 마리가 정답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두 마리의 금붕어는 심하게 서로 다투게 되었고 급기야는 물고 뜯으며 싸우고 또 싸웠다.

“저 놈만 죽으면 이 연못은 나의 영원한 천국이 될 거야”하면서 그렇게 상대방을 죽이는 처절한 전쟁을 날마다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마리가 물 위에 떠올랐다. 그러자 나머지 한 마리의 금붕어는 안도의 한 숨을 쉬며 평안의 천국을 꿈꾸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금붕어마저도 죽어 물 위에 떠오르고 말았다. 먼저 죽었던 금붕어가 썩어 악취를 발하며 조그마한 연못을 온통 더럽혔기 때문이었다.

해가 바뀌고 새해가 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새해를 만드는 주체가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심성과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 조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설 때마다 부패척결이니 부정부패 일소니 하면서 사정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웠지만 그 정부가 새로워진 역사는 아직도 없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들에게도 새해는 있었고 그들 나름대로의 새 정부의 철학은 있었다. 그러나 변화의 역사는커녕 오히려 더욱 부패시켜 역사를 추하게 후퇴시키고 말았다. 그 세력의 실체가 변화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새해에 또 다시 기대를 가져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고 또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스의 교육 개혁자 페스탈로치(1746-1827)는 “고아를 포식시키기는 어렵다. 그들의 위는 허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만은 충만 시킬 수 있다”고 가능성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변화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우리가 공존하고 있는 이 사회를 위해서도 그렇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사는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고아의 공허한 배와 같은 인생들의 허망한 욕심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이 변화 되면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행복의 실체인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1세기를 전후하여 참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이다.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린 예수의 마음은 날마다를 새해와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복된 마음이다. 그 분의 마음에는 항상 행복이 담겨 있고, 그 행복은 그 분이 떠나고 난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뭇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