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하기를 힘써 노력합시다”고 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연설을 듣고 난 후 어떤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하였다. “사랑이란 자연 발생적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이다. 그러자 도산 선생은 “사람의 감정이란 노력하면 할수록 풍성해지고 또한 커지고 높아지는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과연 사랑이란 노력해서 만들어 지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강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저절로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배운 학생이 질문 하였듯이 ‘자연 발생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랑과 미움은 그래서 저절로 일어나는 우리들의 마음상태라고 치부하고 그 흐름에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번 미워진 사람은 다시 사랑하기가 불가능해지고 사랑하던 사람마저도 실망과 배신으로 돌아서게 되어 우리는 사랑과 영원히 담을 쌓은 채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 발생적인 사랑이란 여름에 수박을 먹은 것과 같아서 반복 될수록 그 맛을 잃어가기 때문에 결국에 다 싫어지고 미워지게 마련이다. 우리 주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혼과 자살과 살인이 바로 이와 같은 식어진 사랑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 되어 있는 것이지 그것이 만물의 영장이란 인생들이 누려야 할 삶은 아닌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숙제가 있다. 사랑은 만들어 지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하는 숙제 말이다. 만약 우리 인생들이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동물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사나운 맹수들도 자기 새끼들은 귀여워하고 또 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렇게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사랑만 따라가서는 안 된다. 도산의 말대로 감정을 풍성하고 높게 가져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고 훈계 하셨던 것이다. 만물이 생기를 얻으며 조물주를 기쁘게 하는 생명의 계절 봄이 우리 앞에 찾아 왔다. 우리들의 메마른 가슴에도 사랑의 물이 오르고 향기 내는 꽃을 피워야 하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언제나 그렇게 아름답기 때문이다.

여수 반란사건이 터졌을 때, 무장 공비로부터 두 아들을 동시에 잃었던 손양원목사가 있었다. 그 분은 자신의 두 아들을 사살한 잔인한 살인마를 양자로 삼고 사랑으로 승리하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후대에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칭을 받기도 하였다.

사랑이 만약 자연 발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손 목사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가 사랑스러울 수가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원 높은 역사를 통해 힘겹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의 격언에 “사랑은 언제나 더 한층 뜨겁게 깊어지든가 아니면 점점 더 차갑게 식어진다. 결단코 제자리에 머물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사랑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식어서 차가워지고 내면적 깊은 곳에서 새롭게 만들어 가면 더욱 더 뜨거워진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으로 사랑을 만들 수가 있을까?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109:4)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