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또는 신들에게) 나아갔습니다. 현대인의 경우엔 그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십니다.”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 C.S.루이스가 ‘피고석의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 ‘변호사’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홍성사)>에서 날카로운 통찰과 번뜩이는 재치로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버린 현대인들에게 다가간다.
그는 책에서 신학적·윤리적 질문들로 구성된 48편의 에세이 중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현대 불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 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에 대해 “청중의 머릿속에서 죄의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라며 “이는 우리가 처한 새로운 상황”이라고 토로한다.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은 듣는 이들이 유대인이건 이교도이건 모두 죄책감이 있다고 가정했고, 따라서 당시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한 에반겔리움(Evangelium), 즉 복음(福音)이었다.
루이스는 하나님이 피고석에 앉아 계시고, 인간이 재판장이 된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상당히 이해심 많은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이 전쟁, 가난, 질병을 허용하신 일에 대해 조리에 맞는 항변을 내놓으시면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재판은 하나님의 무죄 방면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판사석에 앉아 있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시다는 겁니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위트 넘치는 반격이다.
현대인이 성경을 믿지 않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기적’임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우리의 선입견은 기적이 정말 일어난다 해도 기적을 감지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고, 반대로 일어나지도 않은 기적을 상상하도록 이끌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자연법칙을 몰랐기 때문에 기적을 믿은 게 아니라, 초자연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기적을 보고 싶어 안달했기 때문에 실제 기적이 아니었던 사건들을 기적적으로 읽어낸 것입니다.”
그리곤 기적이라는 단어를 멋지게 정리한다. “사실 기적이란 전 세계에 너무나 큰 글씨로 적혀 있어 일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이야기를 작은 글씨로 다시 들려주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자연의 운행법칙의 이유를 알 수도 없으면서, 마치 거기서 벗어나면 자기모순이라고 착각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그와 달리 되어선 안될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보기에 따라서는 세상 모든 것이 ‘기적’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변호사’보다는 ‘과학자’가 불신자들에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독교적 관점에 30분 정도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지만 강연장을 나서는 순간, 우리의 글을 내려놓는 순간 그들은 그 반대 입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계로 곧장 되돌아갑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광범위한 성공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기독교를 소개하는 소책자들이 더 필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전제로 다른 학과들을 다룬 소책자들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이 힌두교에 대한 서적 때문에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지질학·식물학·정치학·천문학 입문서를 읽을 때마다 그 책들이 힌두교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면 흔들릴 수 있다. 같은 차원에서 현대인을 유물론자로 만드는 것은 유물론을 직접 변호하는 책들이 아니라, 다른 모든 책들 안에 깔린 유물론적 가정이다. 마찬가지로 유물론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책들 때문에 정말 고민하지는 않지만, 어떤 과학 분야에 대한 저렴한 대중적 개론서를 원할 때마다 시장에 나온 최고의 책이 어김없이 그리스도인의 작품이라면 고민할 것이다.
“이 나라의 재회심으로 가는 첫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잘 아는 주제에 대해 <펭귄문고>나 <사상가 총서>를 압도할 만한 총서를 내는 것입니다. 그 총서의 기독교적 전제는 드러나지 않게 숨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 과학은 완전히 정직해야 합니다. 변증을 위한 왜곡된 과학은 죄악이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변증가라면, 앞의 ‘기적’에서 언급했듯 맨 처음부터 초자연주의를 지지하는 주장을 솔직하게 펼쳐야 한다. “기독교에 물을 타려 하지 마십시오. 초자연적인 요소를 빼버려도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척 가장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기독교는 기적적인 요소와 분리할 수 없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지적인 공략’을 해 온 루이스는, 그렇다고 ‘감정적인 공략’을 과소평가한 것 아니라고 강조한다. 단지 ‘그 측면’을 논할 만한 은사를 받지 못한 터라 조언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게 나오십시오’ 식의 직접적인 복음전도가 100년 전 못지 않게 오늘날에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힘주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신앙 영화를 먼저 상영한 후 찬송가 반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런 직접적인 초청이 이뤄졌을 때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선교팀은 논증을 펼치는 사람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짝이 되는 경우다. “논증을 맡은 사람이 먼저 나서서 청중의 지적 편견을 허물어뜨립니다. 그리고 본래 전도자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러한 접근법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성과 영성의 만남’을 말하는 듯 하다.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 C.S.루이스가 ‘피고석의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 ‘변호사’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홍성사)>에서 날카로운 통찰과 번뜩이는 재치로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버린 현대인들에게 다가간다.
그는 책에서 신학적·윤리적 질문들로 구성된 48편의 에세이 중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현대 불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 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에 대해 “청중의 머릿속에서 죄의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라며 “이는 우리가 처한 새로운 상황”이라고 토로한다.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은 듣는 이들이 유대인이건 이교도이건 모두 죄책감이 있다고 가정했고, 따라서 당시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한 에반겔리움(Evangelium), 즉 복음(福音)이었다.
루이스는 하나님이 피고석에 앉아 계시고, 인간이 재판장이 된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상당히 이해심 많은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이 전쟁, 가난, 질병을 허용하신 일에 대해 조리에 맞는 항변을 내놓으시면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재판은 하나님의 무죄 방면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판사석에 앉아 있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시다는 겁니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위트 넘치는 반격이다.
현대인이 성경을 믿지 않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기적’임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우리의 선입견은 기적이 정말 일어난다 해도 기적을 감지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고, 반대로 일어나지도 않은 기적을 상상하도록 이끌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자연법칙을 몰랐기 때문에 기적을 믿은 게 아니라, 초자연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기적을 보고 싶어 안달했기 때문에 실제 기적이 아니었던 사건들을 기적적으로 읽어낸 것입니다.”
그리곤 기적이라는 단어를 멋지게 정리한다. “사실 기적이란 전 세계에 너무나 큰 글씨로 적혀 있어 일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이야기를 작은 글씨로 다시 들려주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자연의 운행법칙의 이유를 알 수도 없으면서, 마치 거기서 벗어나면 자기모순이라고 착각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그와 달리 되어선 안될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보기에 따라서는 세상 모든 것이 ‘기적’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변호사’보다는 ‘과학자’가 불신자들에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독교적 관점에 30분 정도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지만 강연장을 나서는 순간, 우리의 글을 내려놓는 순간 그들은 그 반대 입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계로 곧장 되돌아갑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광범위한 성공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기독교를 소개하는 소책자들이 더 필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전제로 다른 학과들을 다룬 소책자들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이 힌두교에 대한 서적 때문에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지질학·식물학·정치학·천문학 입문서를 읽을 때마다 그 책들이 힌두교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면 흔들릴 수 있다. 같은 차원에서 현대인을 유물론자로 만드는 것은 유물론을 직접 변호하는 책들이 아니라, 다른 모든 책들 안에 깔린 유물론적 가정이다. 마찬가지로 유물론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책들 때문에 정말 고민하지는 않지만, 어떤 과학 분야에 대한 저렴한 대중적 개론서를 원할 때마다 시장에 나온 최고의 책이 어김없이 그리스도인의 작품이라면 고민할 것이다.
“이 나라의 재회심으로 가는 첫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잘 아는 주제에 대해 <펭귄문고>나 <사상가 총서>를 압도할 만한 총서를 내는 것입니다. 그 총서의 기독교적 전제는 드러나지 않게 숨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 과학은 완전히 정직해야 합니다. 변증을 위한 왜곡된 과학은 죄악이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변증가라면, 앞의 ‘기적’에서 언급했듯 맨 처음부터 초자연주의를 지지하는 주장을 솔직하게 펼쳐야 한다. “기독교에 물을 타려 하지 마십시오. 초자연적인 요소를 빼버려도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척 가장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기독교는 기적적인 요소와 분리할 수 없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지적인 공략’을 해 온 루이스는, 그렇다고 ‘감정적인 공략’을 과소평가한 것 아니라고 강조한다. 단지 ‘그 측면’을 논할 만한 은사를 받지 못한 터라 조언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게 나오십시오’ 식의 직접적인 복음전도가 100년 전 못지 않게 오늘날에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힘주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신앙 영화를 먼저 상영한 후 찬송가 반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런 직접적인 초청이 이뤄졌을 때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선교팀은 논증을 펼치는 사람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짝이 되는 경우다. “논증을 맡은 사람이 먼저 나서서 청중의 지적 편견을 허물어뜨립니다. 그리고 본래 전도자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러한 접근법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성과 영성의 만남’을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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