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자가 사자에게 쫓기고 있었다. 한참 도망 다니다가 남자는 그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긴박해진 남자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자 한입에 남자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사자가 갑자기 멈추는 것이었다. 너무 이상해서 살짝 눈을뜨고 보니, 사자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살았구나” 안도의 숨을 쉰 남자는 물었다. “사자님! 무슨 기도하고 계세요?” 그러자 사자가 하는 말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으로 기도를 한 것이다.
이 예화는 듣는 사람에게는 웃기는 이야기 이지만 본인 당사자에게는 생사가 결려 있는 절대적인 위기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위기에 대해 어떤 대처 방안도 내어 놓을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처하게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런 딜레마에 처하는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서 어려운 난관을 뚫고 나아갈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바로 윤리와 양심에 부합되지 아니하는 정도(正道)의 길을 선택하면 상황은 급변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과 인내를 통해 오래가지 아니하여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가끔 출퇴근 시간에 I-5와 405 하이웨이를 운전하다보면 도로상에 특별한 사고가 없는데도 교통체증으로 인해 약속한 시간내에 약속장소에 가지못하는 일들이 생기는데 어떤 때에는 너무나 길이 막히면 머리속에 많은 생각들이 교차된다. 다른 도로로 우회하여 가면 안될까 생각해 보아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우회 해서 가는 길도 동일하게 막힐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급행선(express line)을 타고 다른 차들보다 빨리 앞으로 가면 어떨까에 대한 양심에 거슬리는 “마음의 유혹”이 생기게 되지만 만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차선을 변경하여 운전한다면 분명 어디에선가 경찰이 달려와서 티켓을 발부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앞에 많은 차량이 있어 기어가는 교통체증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운전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 즉 정도(正道)의 길이며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교통체증에 대해 짜증을 내고 인내하지 못한 사람들이 운전석 옆에 동행한 사람이 없으면서도 남들보다 더 빨리 가려고 급행선(Express line)으로 차선을 변경하여 운전을 하다가 도로경찰에게 잡히는 사람들을 종종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통법규 위반으로인한 벌금을 부여받게 될뿐 아니라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번거로움 그리고 현장에서 경찰에게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 다른 운전자들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도로상의 교통체증은 어느누구에게나 동일한 괴로움이지만 “가서는 아니되는 길에 가게 되면” 그에 맞는 처벌을 받게 된다.
우리 속담에 “말이 아니면 듣지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은 말은 듣지도 말고 옳지 않은 일을 행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처한 환경을 말하고 싶고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 놓는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충분한 상담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서 답을 얻어려고들 한다. 육신에 질병을 가진 사람이 의사를 만나지 아니하고 주변 친구나 가족들의 말을 듣고 자신도 그러한 병이 있어서 지금 그 약을 먹고 있는데 “내가 먹는 약을 가져가서 먹어보고 필요하면 더 가져가세요”라는 권고에 의해 의사 처방없이 친구와 이웃이 주는 약을 복용하게 되면 오히려 큰 병을 낳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목에서 자신이 목적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헤서 누군가에게 그 길을 물어 보았을때 질문을 받은 사람이 “제 생각으로는 이리 가다가 저리로 가보세요.” “그리고 모르시면 가시다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르침대로 따라 간다면 때로는 목적지를 코 앞에다 두고도 전혀 다른 곳에가서 길을 찾아 해메이다 보면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만일 길이 보이지 아니하는 정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상황을 도래하게 된다. 자신이 가려고 하는 방향을 대충알고 전혀 모르는 곳이라면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조사를 해 보아야 할 것이며 그길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다. 인생의 삶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네비게이션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이유를 요한 복음 14:6절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말은 삶의 참된 진리와 올바른 길 그리고 영생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을 표현한 것이다.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해고되고 임금의 삭감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때에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돈이겠지만 돈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고 돈 보다도 더 우선적이어야 하는 것은 “삶의 주권을 가지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삶이 어려울 때 일수록 사람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간이나 쓸개를 다 빼어 줄 것같이 도움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덮석 엎드리고 나면 분명 언젠가는 이해관계에 불균형이 발생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등을 돌리게 될뿐 아니라 그러한 일 때문에 평생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를 갖고 살아가게 된다.
언제나 동일하게 사랑하시며 변하시지 아니하시는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행복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믿고 살아갈 “온전한 길”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난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삶 가운데 어려운 갈등들이 주어질지라도 올바른 길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제대로 안다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심하게 구부러진 죄의 길에 서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러자 한입에 남자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사자가 갑자기 멈추는 것이었다. 너무 이상해서 살짝 눈을뜨고 보니, 사자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살았구나” 안도의 숨을 쉰 남자는 물었다. “사자님! 무슨 기도하고 계세요?” 그러자 사자가 하는 말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으로 기도를 한 것이다.
이 예화는 듣는 사람에게는 웃기는 이야기 이지만 본인 당사자에게는 생사가 결려 있는 절대적인 위기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위기에 대해 어떤 대처 방안도 내어 놓을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처하게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런 딜레마에 처하는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서 어려운 난관을 뚫고 나아갈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바로 윤리와 양심에 부합되지 아니하는 정도(正道)의 길을 선택하면 상황은 급변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과 인내를 통해 오래가지 아니하여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가끔 출퇴근 시간에 I-5와 405 하이웨이를 운전하다보면 도로상에 특별한 사고가 없는데도 교통체증으로 인해 약속한 시간내에 약속장소에 가지못하는 일들이 생기는데 어떤 때에는 너무나 길이 막히면 머리속에 많은 생각들이 교차된다. 다른 도로로 우회하여 가면 안될까 생각해 보아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우회 해서 가는 길도 동일하게 막힐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급행선(express line)을 타고 다른 차들보다 빨리 앞으로 가면 어떨까에 대한 양심에 거슬리는 “마음의 유혹”이 생기게 되지만 만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차선을 변경하여 운전한다면 분명 어디에선가 경찰이 달려와서 티켓을 발부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앞에 많은 차량이 있어 기어가는 교통체증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운전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 즉 정도(正道)의 길이며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교통체증에 대해 짜증을 내고 인내하지 못한 사람들이 운전석 옆에 동행한 사람이 없으면서도 남들보다 더 빨리 가려고 급행선(Express line)으로 차선을 변경하여 운전을 하다가 도로경찰에게 잡히는 사람들을 종종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통법규 위반으로인한 벌금을 부여받게 될뿐 아니라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번거로움 그리고 현장에서 경찰에게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 다른 운전자들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도로상의 교통체증은 어느누구에게나 동일한 괴로움이지만 “가서는 아니되는 길에 가게 되면” 그에 맞는 처벌을 받게 된다.
우리 속담에 “말이 아니면 듣지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은 말은 듣지도 말고 옳지 않은 일을 행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처한 환경을 말하고 싶고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 놓는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충분한 상담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서 답을 얻어려고들 한다. 육신에 질병을 가진 사람이 의사를 만나지 아니하고 주변 친구나 가족들의 말을 듣고 자신도 그러한 병이 있어서 지금 그 약을 먹고 있는데 “내가 먹는 약을 가져가서 먹어보고 필요하면 더 가져가세요”라는 권고에 의해 의사 처방없이 친구와 이웃이 주는 약을 복용하게 되면 오히려 큰 병을 낳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목에서 자신이 목적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헤서 누군가에게 그 길을 물어 보았을때 질문을 받은 사람이 “제 생각으로는 이리 가다가 저리로 가보세요.” “그리고 모르시면 가시다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르침대로 따라 간다면 때로는 목적지를 코 앞에다 두고도 전혀 다른 곳에가서 길을 찾아 해메이다 보면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만일 길이 보이지 아니하는 정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상황을 도래하게 된다. 자신이 가려고 하는 방향을 대충알고 전혀 모르는 곳이라면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조사를 해 보아야 할 것이며 그길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다. 인생의 삶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네비게이션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이유를 요한 복음 14:6절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말은 삶의 참된 진리와 올바른 길 그리고 영생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을 표현한 것이다.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해고되고 임금의 삭감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때에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돈이겠지만 돈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고 돈 보다도 더 우선적이어야 하는 것은 “삶의 주권을 가지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삶이 어려울 때 일수록 사람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간이나 쓸개를 다 빼어 줄 것같이 도움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덮석 엎드리고 나면 분명 언젠가는 이해관계에 불균형이 발생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등을 돌리게 될뿐 아니라 그러한 일 때문에 평생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를 갖고 살아가게 된다.
언제나 동일하게 사랑하시며 변하시지 아니하시는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행복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믿고 살아갈 “온전한 길”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난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삶 가운데 어려운 갈등들이 주어질지라도 올바른 길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제대로 안다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심하게 구부러진 죄의 길에 서지는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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