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호령하던 조조가 병들었을 때다. 간신들이 조조에게 아뢰기를 당대에 神醫<신의>라고 불리는 유명한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을 불러 치료를 받아 보시라고 한다. 조조가 그 간청을 좋게 여겨 그 의사를 부르게 한다. 그 사람은 [화타]라는 名醫<명의>로서 서기 200년대에 이미 배를 갈라 수술을 하던 인물이었다.
조조를 진맥해 본 그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뒤지더니 조그마한 도끼를 꺼내 든다. 깜짝 놀란 조조가 뭐하는 짓이냐? 고 소리치자 화타는 무표정하게 “폐하의 머리를 갈라 수술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고 대답 한다. 그 순간 조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하를 부른다. “저놈이 관우하고 친하다고 하더니 마침내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내 머리를 쪼개려 한다”고 대노하며 당장에 투옥시키고 고문하라고 명한다.
그 길로 화타는 감옥에 투옥 되고 온갖 고문을 다 받다가 옥사하고 만다. 조조자신도 역시 병에서 회복을 받지 못한 채 운명하고 만다. 이 이야기는 서기 2백년 경에 있었던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을 의심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불행하게 된다는 좋은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 불행한 사람들의 고칠 수 없는 속성이 있으니 믿지를 못하고 의심하고 염려하는 소인배의 행세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타락해 버렸던 아담과 하와의 피가 우리들 속 깊은 곳에다 불신을 심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시대가 바로 이처럼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불행한 시대로 전락해 버린 것은 시대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도대체 신뢰가 없다. 하기야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 또한 자식을 죽이는 형국인데 거기에 무슨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불행이 있는 것이다.
함께 일하던 부하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원대로 해 주지 않는다고 총을 들이대고 달려든다면 어떻게 사람을 거느리고 일 할 수가 있겠는가?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주인을 향해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권총을 들고 달려든다면 어떻게 세놓고 살겠는가? 바로 이와 같은 사실들은 가상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해고 되었다고 무차별 총을 난사 하여 고귀한 인명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그 얼마이며 LA 한인 사회에 큰 사업가로 꼽히던 김태현 씨가 세든 박용만 씨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 역시 예외가 아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깨진 인간관계란 화약고와 같이도 무서운 것이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삶이란 그래서 행복 하다. 비록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못하여도, 천하를 호령하는 큰 권세를 가지지 못해도 서로 믿고 사랑하며 의지하고 사는 삶이란 그 자체가 곧 천국인 것이다.
아무리 참 사랑을 쏟아 주어도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사랑이란 결국 신뢰해 주고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좋은 계절 밸런타인데이도 다가오고 있는데 이 좋은 2월에는 믿음으로 사랑을 새롭게 회복하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으로 의심을 몰아내고 행복의 보금자리를 더 두텁게 깔았으면 좋겠다.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취가 말했듯이 ‘의심의 끝이 바로 안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4경에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작은 배를 노저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서 유령 같은 물체가 나타나 제자들이 혼비백산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즉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타나서 ‘지금 물 위로 오시는 이가 진짜 주님이시면 나로 하여금 주님과 같이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소서’라면서 주님이심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즉시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성큼 물 위로 내려서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 후에 곧 물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그 때에 주님께서 손을 내 밀어 베드로를 건지시며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 하셨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믿는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장기려 박사가 임상실험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였다. 즉, 중환자에게 밀가루를 제조한 약처럼 처방하여 주면서 ‘이 약은 일본에서 직수입한 당신 병에 특효약입니다’며 먹였더니 그 밀가루를 먹고 병을 이기고 낫더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처럼 확실한 신념과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 의심과 염려는 사람의 뼈를 썩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기 때문이다.
조조를 진맥해 본 그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뒤지더니 조그마한 도끼를 꺼내 든다. 깜짝 놀란 조조가 뭐하는 짓이냐? 고 소리치자 화타는 무표정하게 “폐하의 머리를 갈라 수술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고 대답 한다. 그 순간 조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하를 부른다. “저놈이 관우하고 친하다고 하더니 마침내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내 머리를 쪼개려 한다”고 대노하며 당장에 투옥시키고 고문하라고 명한다.
그 길로 화타는 감옥에 투옥 되고 온갖 고문을 다 받다가 옥사하고 만다. 조조자신도 역시 병에서 회복을 받지 못한 채 운명하고 만다. 이 이야기는 서기 2백년 경에 있었던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을 의심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불행하게 된다는 좋은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 불행한 사람들의 고칠 수 없는 속성이 있으니 믿지를 못하고 의심하고 염려하는 소인배의 행세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타락해 버렸던 아담과 하와의 피가 우리들 속 깊은 곳에다 불신을 심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시대가 바로 이처럼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불행한 시대로 전락해 버린 것은 시대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도대체 신뢰가 없다. 하기야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 또한 자식을 죽이는 형국인데 거기에 무슨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불행이 있는 것이다.
함께 일하던 부하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원대로 해 주지 않는다고 총을 들이대고 달려든다면 어떻게 사람을 거느리고 일 할 수가 있겠는가?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주인을 향해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권총을 들고 달려든다면 어떻게 세놓고 살겠는가? 바로 이와 같은 사실들은 가상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해고 되었다고 무차별 총을 난사 하여 고귀한 인명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그 얼마이며 LA 한인 사회에 큰 사업가로 꼽히던 김태현 씨가 세든 박용만 씨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 역시 예외가 아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깨진 인간관계란 화약고와 같이도 무서운 것이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삶이란 그래서 행복 하다. 비록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못하여도, 천하를 호령하는 큰 권세를 가지지 못해도 서로 믿고 사랑하며 의지하고 사는 삶이란 그 자체가 곧 천국인 것이다.
아무리 참 사랑을 쏟아 주어도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사랑이란 결국 신뢰해 주고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좋은 계절 밸런타인데이도 다가오고 있는데 이 좋은 2월에는 믿음으로 사랑을 새롭게 회복하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으로 의심을 몰아내고 행복의 보금자리를 더 두텁게 깔았으면 좋겠다.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취가 말했듯이 ‘의심의 끝이 바로 안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4경에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작은 배를 노저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서 유령 같은 물체가 나타나 제자들이 혼비백산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즉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타나서 ‘지금 물 위로 오시는 이가 진짜 주님이시면 나로 하여금 주님과 같이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소서’라면서 주님이심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즉시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성큼 물 위로 내려서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 후에 곧 물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그 때에 주님께서 손을 내 밀어 베드로를 건지시며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 하셨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믿는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장기려 박사가 임상실험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였다. 즉, 중환자에게 밀가루를 제조한 약처럼 처방하여 주면서 ‘이 약은 일본에서 직수입한 당신 병에 특효약입니다’며 먹였더니 그 밀가루를 먹고 병을 이기고 낫더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처럼 확실한 신념과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 의심과 염려는 사람의 뼈를 썩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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