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교회 제 41주년 기념 감사예배 시 장재효 목사님께 드리는 글
먼저 이 자리에 세워주셔서 그동안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글로나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 바람이 기분좋게 부는 10월에 접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 나이 28세 쯤이었던가 봅니다.
전에 이곳에 있던 교회를 두어 달 다니고 있을 무렵, 옥수동에 있는 성은교회가 이 곳에 이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난 꼭 그 교회를 다녀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그때까지 그저 교회는 지루한 곳으로만 생각하며 다닐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목사님을 통해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이 너무나 기다려지고 예배가 왜 그렇게 빨리 끝나는지 아쉽기만 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면서 어떤 말씀은… 뭐랄까… 토네이도처럼 회오리를 일으키며 배 밑까지 파고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말씀은 가슴 속 깊이 회개의 통곡이 터져 나오게도 하고, 또 어떤 말씀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으로 인해 일어나 춤을 추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진리정통한 말씀으로 선포되어진 말씀들이 있었기에 그 어떤 이단 사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진리의 말씀으로 맞서 싸워 이길 수 있게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며칠 전 미국 CBS 방송국에서 목사님과 우리 교회를 통해 40여년이 넘는 세월을 성령님의 역사와 행하신 이적 기사를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일정 가운데 여러 집사님과 권사님, 장로님들과 구미 성은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구미 성은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 내외 분은 물론이고 많은 성도님들이 반기는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옆에서 식사를 하셨던 집사님 한 분은 서울에서 장재효 목사님이 오신다기에 뵙고 싶어서 이틀을 휴가를 내서 왔다고 하시며 “목사님 너무 좋아요”라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아마도 몇해 전 목사님께서 살고 계시던 사택을 팔아 구미에 예배당을 세워주셔서 곰팡이 냄새나는 좁은 지하교회를 벗어날 수 있었던 교인의 한 분으로써 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수요일이었던 그날 그곳은 정말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집사님들이 한복을 곱게 입고 찬양과 율동을 하고 우리 목사님 내외 분께 감사의 편지를 읽어드리고 꽃다발을 목에 걸어드리는 모습 속에서 목사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의 마음이 각별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교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 교회 S 권사님께서 눈물을 글썽이시며 “난 오늘 많은 것을 회개한다고 하시며 저분들은 목사님에 대한 마음들을 잘도 표현하는데 우리는 마음 속에만 품고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 M 권사님께서 “그럼, 우리 지금 목사님~ 사랑합니다~고 연습해 봅시다”하고 선창하시는 바람에 우리 모두 한바탕 웃으며 연습까지 하며 즐겁게 왔지만 여전히 표현에 인색한 우리들이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을 통해 너무도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고 알아감에 감사드립니다.
몇해 전 신평 성은교회 부지를 마련해 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목사님 댁을 또 팔아 오산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셔서 정리를 돕기 위해 따라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서재를 정리하던 저는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습니다. 좁은 방에 낡은 책장과 소박한 살림살이들을 보는 순간, 목사님 자신을 위해서는 단돈 천원도 아까워 하시면서 바른 목회 연구원과 기도원 총연합회 총재를 맡으셔서 많은 어려운 기도원 원장님들과 개척교회 목사님들을 보면 주머니의 돈을 몽땅 꺼내 다 드리고, 더 줄게 없어 난감해 하시는 목사님인 것을 아는 저였기에…. 또 어디 굶는 양떼는 없을까, 헐벗은 양떼는 없을까, 살피시며 41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양떼를 위해 한 평생 살아오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강단에서 “나처럼 살아라” 하시며 몸소 본을 보여주시는 우리 목사님.
철없는 저도 목사님을 너무나 잘 알고 목사님 생각만 하면 마음 한 구석이 찡해오며 아려오건만, 옥수동에서부터 같이 굶고, 같이 울며 목사님을 통해 많은 이적과 기사를 체험한 우리 권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분들의 말씀이 “목사님!”하고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는 말씀이 이제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종종 강단에서 말씀 전하시다 주님 앞에 가셨을 때 듣고 싶은 말씀이 “그래! 수고했다!”라는 말씀이면 족하다고 하셨죠? 순교적 사명의지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영적 제일주의 신앙을 가르쳐주신 목사님! 먼 훗날 우리 주님 만나실때 주님께서 한 걸음에 달려오셔서 꼭 안아 주시면서 “그래 내가 안다. 그래 내가 안다… 네가 날 얼마나 사랑했기에 내가 맡긴 나의 자녀들을 네 살같이 입히고 먹이고 보살폈겠니”라며 말씀하실 거라 확신합니다.
전 종종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목사님은 양떼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피라도 짜고, 살이라도 떼어서 먹이실 분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요….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선한 곳에 쓰시기 위해 소박함과 검소함을 택하셨고 더 많은 것을 누리실 수 있지만 더 많은 영혼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신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 아직도 더 많이 배우고 더 훈련되어야 하겠기에 우리들이 목사님께 집착하고 있음을 이해해 주세요.
“이젠 좀 놓아달라”하시지만 여전히 놓아드릴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목사님을 통해 선포되는 진리 정통한 말씀에 여전히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울자면 울고, 웃으라면 웃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목사님을 통해 우리 주님의 뜻인 세계 선교의 사명을 차질없이 이루어 드리는 길인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제작될 다큐멘터리를 통해 성령님께서 목사님을 통하여 우리 교회에 행하신 일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갈 때 교회사에 기록될 신 사도행전 29장이 쓰여질 것이 기대됩니다.
목사님! 다시 한번 우리들의 손을 꼭 잡아주세요.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 싸워서 넉넉히 이기는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영적 승리의 그날 까지.
목사님, 우리 목사님.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2011년 10월 1일 권사 사은성 올림.
먼저 이 자리에 세워주셔서 그동안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글로나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 바람이 기분좋게 부는 10월에 접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 나이 28세 쯤이었던가 봅니다.
전에 이곳에 있던 교회를 두어 달 다니고 있을 무렵, 옥수동에 있는 성은교회가 이 곳에 이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난 꼭 그 교회를 다녀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그때까지 그저 교회는 지루한 곳으로만 생각하며 다닐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목사님을 통해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이 너무나 기다려지고 예배가 왜 그렇게 빨리 끝나는지 아쉽기만 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면서 어떤 말씀은… 뭐랄까… 토네이도처럼 회오리를 일으키며 배 밑까지 파고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말씀은 가슴 속 깊이 회개의 통곡이 터져 나오게도 하고, 또 어떤 말씀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으로 인해 일어나 춤을 추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진리정통한 말씀으로 선포되어진 말씀들이 있었기에 그 어떤 이단 사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진리의 말씀으로 맞서 싸워 이길 수 있게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며칠 전 미국 CBS 방송국에서 목사님과 우리 교회를 통해 40여년이 넘는 세월을 성령님의 역사와 행하신 이적 기사를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일정 가운데 여러 집사님과 권사님, 장로님들과 구미 성은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구미 성은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 내외 분은 물론이고 많은 성도님들이 반기는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옆에서 식사를 하셨던 집사님 한 분은 서울에서 장재효 목사님이 오신다기에 뵙고 싶어서 이틀을 휴가를 내서 왔다고 하시며 “목사님 너무 좋아요”라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아마도 몇해 전 목사님께서 살고 계시던 사택을 팔아 구미에 예배당을 세워주셔서 곰팡이 냄새나는 좁은 지하교회를 벗어날 수 있었던 교인의 한 분으로써 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수요일이었던 그날 그곳은 정말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집사님들이 한복을 곱게 입고 찬양과 율동을 하고 우리 목사님 내외 분께 감사의 편지를 읽어드리고 꽃다발을 목에 걸어드리는 모습 속에서 목사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의 마음이 각별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교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 교회 S 권사님께서 눈물을 글썽이시며 “난 오늘 많은 것을 회개한다고 하시며 저분들은 목사님에 대한 마음들을 잘도 표현하는데 우리는 마음 속에만 품고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 M 권사님께서 “그럼, 우리 지금 목사님~ 사랑합니다~고 연습해 봅시다”하고 선창하시는 바람에 우리 모두 한바탕 웃으며 연습까지 하며 즐겁게 왔지만 여전히 표현에 인색한 우리들이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을 통해 너무도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고 알아감에 감사드립니다.
몇해 전 신평 성은교회 부지를 마련해 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목사님 댁을 또 팔아 오산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셔서 정리를 돕기 위해 따라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서재를 정리하던 저는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습니다. 좁은 방에 낡은 책장과 소박한 살림살이들을 보는 순간, 목사님 자신을 위해서는 단돈 천원도 아까워 하시면서 바른 목회 연구원과 기도원 총연합회 총재를 맡으셔서 많은 어려운 기도원 원장님들과 개척교회 목사님들을 보면 주머니의 돈을 몽땅 꺼내 다 드리고, 더 줄게 없어 난감해 하시는 목사님인 것을 아는 저였기에…. 또 어디 굶는 양떼는 없을까, 헐벗은 양떼는 없을까, 살피시며 41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양떼를 위해 한 평생 살아오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강단에서 “나처럼 살아라” 하시며 몸소 본을 보여주시는 우리 목사님.
철없는 저도 목사님을 너무나 잘 알고 목사님 생각만 하면 마음 한 구석이 찡해오며 아려오건만, 옥수동에서부터 같이 굶고, 같이 울며 목사님을 통해 많은 이적과 기사를 체험한 우리 권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분들의 말씀이 “목사님!”하고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는 말씀이 이제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종종 강단에서 말씀 전하시다 주님 앞에 가셨을 때 듣고 싶은 말씀이 “그래! 수고했다!”라는 말씀이면 족하다고 하셨죠? 순교적 사명의지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영적 제일주의 신앙을 가르쳐주신 목사님! 먼 훗날 우리 주님 만나실때 주님께서 한 걸음에 달려오셔서 꼭 안아 주시면서 “그래 내가 안다. 그래 내가 안다… 네가 날 얼마나 사랑했기에 내가 맡긴 나의 자녀들을 네 살같이 입히고 먹이고 보살폈겠니”라며 말씀하실 거라 확신합니다.
전 종종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목사님은 양떼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피라도 짜고, 살이라도 떼어서 먹이실 분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요….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선한 곳에 쓰시기 위해 소박함과 검소함을 택하셨고 더 많은 것을 누리실 수 있지만 더 많은 영혼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신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 아직도 더 많이 배우고 더 훈련되어야 하겠기에 우리들이 목사님께 집착하고 있음을 이해해 주세요.
“이젠 좀 놓아달라”하시지만 여전히 놓아드릴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목사님을 통해 선포되는 진리 정통한 말씀에 여전히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울자면 울고, 웃으라면 웃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목사님을 통해 우리 주님의 뜻인 세계 선교의 사명을 차질없이 이루어 드리는 길인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제작될 다큐멘터리를 통해 성령님께서 목사님을 통하여 우리 교회에 행하신 일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갈 때 교회사에 기록될 신 사도행전 29장이 쓰여질 것이 기대됩니다.
목사님! 다시 한번 우리들의 손을 꼭 잡아주세요.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 싸워서 넉넉히 이기는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영적 승리의 그날 까지.
목사님, 우리 목사님.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2011년 10월 1일 권사 사은성 올림.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