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 맨몸, 맨땅의 3M 목회자로 재적교인 3만여 명 대형 교회로 일군 소강석 목사는 1962년 전라북도 남원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1979년 고교 2학년 때 주님을 만나 목회자로 헌신했다. 소 목사의 뜨거운 신앙은 한학자였던 아버지의 눈에 곱지 않게 보였고 결국 이듬해인 1980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었다.
외로움과 핍박 속에서도 소 목사는 소명을 버리지 않고 1980년 광주신학교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신학교 시절, 그는 수박과 오이 장사, 막노동판 등을 전전하면서도 소망을 버리지 않았고, 고학으로 신학교를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이던 1981년에는 유교적 전통과 미신문화가 강했던 전라도 화순에 백암교회를 개척했고, 지역 주민들의 반대와 핍박 속에도 3년간 척박한 땅을 일궜다. 1987년 총회개혁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소 목사는 이듬해인 1988년 서울 가락동에서 새에덴교회를 개척했다.
◈1만여 평 규모, 3만 여 성도의 새에덴교회의 시작= 지하 23평 상가건물에서 시작된 새에덴교회는 창문하나 없는 예배당에 쥐가 돌아다니고 천장에서는 물이 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소 목사는 텅 빈 성전에서 배정숙 사모와 장모인 정금성 권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던 날도 많았다. 그는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100일 작정기도로 강단에서 자면서도 부흥을 위해 몸부림쳤다. 열악한 상황가운데서도 목회전략을 수립하고 설문지를 돌리며 지역 사람들의 종교 실태와 성향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소목사의 열정적인 목회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장년 성도가 50명이 되었을 때는 전도요원을 양성해 전도하기 시작했고, 개척한지 1년이 조금 넘어 기획한 총동원주일에는 2500명이 참석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교회를 개척한지 4년이 지나서는 출석성도 300명을 넘지 못하던 상가 교회를 탈피하고 성전건축을 결단했다.
◈통일한국 시대를 대비할 민족교회로의 꿈= 순탄치 않는 상황가운데서도 기도하며 어려움을 극복했던 분당 성전은 1996년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빠른 시간 5천명이 모였다. 지금의 용인 성전은 소 목사가 2001년 평양을 방문했던 일이 계기가 됐다. 북한 봉수교회에서 설교한 소 목사는 북한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면서 통일한국시대의 비전을 발견하게 됐고, 통일한국 시대를 대비한 인재양성을 시대적 사명으로 깨닫게 된다.
2005년 7월 첫 예배를 드린 1만 여 평 규모의 용인 프라미스 컴플렉스에는 현재 3만 여명이 출석하며 통일한국시대를 준비하는 민족성전으로 발돋움하길 준비하고 있다.
소 목사는 역경의 목회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공부로 1993년 총회 개혁신학대학원 신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1999년에는 미국 낙스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6년부터는 개혁신학대학원과 2005년부터는 광신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또한 그는 목회저서 12권과 3권의 시집을 출간하면서 활발한 저술 활동 펼치고 있다.
최근 소강석 목사는 10월 5일 외교통상부가 주최한 제5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한·미 관계 발전과 미주지역 동포 위상 강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한 소 목사는 세계한인교류협력기구 공동대표로 봉사하면서 국회의원들과 협력해 ‘미주한인의 날’과 ‘세계한인의 날’ 제정을 위한 입법 및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등 재외동포 지원 사업에 앞장서 왔다.
또한 새에덴교회에서는 지난 2007년부터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를 초청해 기념예배 및 행사를 가져 한미 우호증진에 기여해왔다. 초청행사는 새에덴교회의 대표적 민간외교 행사로 자리를 잡았으며,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에 앞서 한·미 양국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2007년 미국 마틴루터킹재단으로부터 국제평화상을, 지난 8월에는 미국 해외 참전용사협회로부터 금훈장을 각각 받기도 했다.
외로움과 핍박 속에서도 소 목사는 소명을 버리지 않고 1980년 광주신학교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신학교 시절, 그는 수박과 오이 장사, 막노동판 등을 전전하면서도 소망을 버리지 않았고, 고학으로 신학교를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이던 1981년에는 유교적 전통과 미신문화가 강했던 전라도 화순에 백암교회를 개척했고, 지역 주민들의 반대와 핍박 속에도 3년간 척박한 땅을 일궜다. 1987년 총회개혁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소 목사는 이듬해인 1988년 서울 가락동에서 새에덴교회를 개척했다.
◈1만여 평 규모, 3만 여 성도의 새에덴교회의 시작= 지하 23평 상가건물에서 시작된 새에덴교회는 창문하나 없는 예배당에 쥐가 돌아다니고 천장에서는 물이 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소 목사는 텅 빈 성전에서 배정숙 사모와 장모인 정금성 권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던 날도 많았다. 그는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100일 작정기도로 강단에서 자면서도 부흥을 위해 몸부림쳤다. 열악한 상황가운데서도 목회전략을 수립하고 설문지를 돌리며 지역 사람들의 종교 실태와 성향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소목사의 열정적인 목회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장년 성도가 50명이 되었을 때는 전도요원을 양성해 전도하기 시작했고, 개척한지 1년이 조금 넘어 기획한 총동원주일에는 2500명이 참석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교회를 개척한지 4년이 지나서는 출석성도 300명을 넘지 못하던 상가 교회를 탈피하고 성전건축을 결단했다.
◈통일한국 시대를 대비할 민족교회로의 꿈= 순탄치 않는 상황가운데서도 기도하며 어려움을 극복했던 분당 성전은 1996년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빠른 시간 5천명이 모였다. 지금의 용인 성전은 소 목사가 2001년 평양을 방문했던 일이 계기가 됐다. 북한 봉수교회에서 설교한 소 목사는 북한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면서 통일한국시대의 비전을 발견하게 됐고, 통일한국 시대를 대비한 인재양성을 시대적 사명으로 깨닫게 된다.
2005년 7월 첫 예배를 드린 1만 여 평 규모의 용인 프라미스 컴플렉스에는 현재 3만 여명이 출석하며 통일한국시대를 준비하는 민족성전으로 발돋움하길 준비하고 있다.
최근 소강석 목사는 10월 5일 외교통상부가 주최한 제5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한·미 관계 발전과 미주지역 동포 위상 강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한 소 목사는 세계한인교류협력기구 공동대표로 봉사하면서 국회의원들과 협력해 ‘미주한인의 날’과 ‘세계한인의 날’ 제정을 위한 입법 및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등 재외동포 지원 사업에 앞장서 왔다.
또한 새에덴교회에서는 지난 2007년부터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를 초청해 기념예배 및 행사를 가져 한미 우호증진에 기여해왔다. 초청행사는 새에덴교회의 대표적 민간외교 행사로 자리를 잡았으며,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에 앞서 한·미 양국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2007년 미국 마틴루터킹재단으로부터 국제평화상을, 지난 8월에는 미국 해외 참전용사협회로부터 금훈장을 각각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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