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여수에 가면 ‘여수 애양원’이 있다. 오랜 세월 음성 나병환자들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붙들고 있던 눈물겨운 곳이다. 그 애양원을 끼고 바닷가로 돌아 나가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안고 동그마니 남아 있는 세 무덤이 나타난다. 그 유명한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고 손양원 목사님과 그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의 묘다.

1948년 10월 19일, 손양원 목사님은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큰아들 동인이와 작은아들 동신이를 동시에 무장 공비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잃게 된다. 자식을 잃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그 아픔을 모르리라!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자식을 잃어도 가슴에 한이 맺히는 것이 부모다. 그런데 이제 겨우 스무 살 전후로 만리 같은 미래의 꿈을 안고 자라나는 아들을, 그것도 두 아들을 순식간에 악한 무장 공비의 손에 잃었다면 그 원통함은 그 얼마나 컸을까? 가히 짐작이 간다. 옛 말에도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어도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을 동시에 잃은 그 부모의 가슴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그 잔인한 원수를 ‘용서’하였던 것이다. 범인을 취조하던 경찰에서부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놀랐다. 더 더욱 놀란 것은 범인 자신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여 이토록 넘치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용서’, 바로 이것이다. 용서는 사랑이 응어리 되어 열매로 굳어진 사랑의 결정체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새롭게 변하도록 역사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는 이와 같은 값진 용서가 없다. 모두가 재판관이 되어 있고 강력반 형사가 되어 있다. 그래서 없는 것까지도 들추어내어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들의 가정도 사회도 다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교회까지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살기가 어렵다. 그 어디에도 훈훈한 사랑의 바람이 없다. 영하 20도의 추운 겨울에도 양지바른 곳은 있는 법인데, 이렇게 따뜻한 시애틀에 살면서도 모두가 춥고 을씨년스럽다. 가슴 가슴마다 동장군이 진입하여 용서를 쫓아냈기 때문이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함께 어우러져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고 덕담을 나누며 먹거리 풍성한 이 시대에 맛있는 것 함께 먹으며 얼굴 마주 보며 破顔大笑(파안대소)하고 산다면, 이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용서’가 없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가슴에서 힘차게 살고 있었던 그 따뜻하고 포근한 용서가 우리 가슴을 떠났기 때문이다.

정죄하고 질타하고 책망하고 야단하는 그곳에는 결코 사람을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이 살수가 없다. 넉넉한 가슴으로 품어 주고 참아 주고 기다려 주며 기대해 주는 ‘용서’만이 사람을 내 품에 잠들게 하는 비상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날아다니는 철새도 제 보금자리 펼 데를 안다. 하물며 이렇게 놀라운 힘을 지닌 용서가 아무데서나 서식하겠는가? 오직 사랑으로 다듬어진 포근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만 살아 역사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용서’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의 가슴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만이 삭막한 이 세상에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영글어진 넉넉한 용서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