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뉴욕지구한인목사회(회장 김용익 목사)가 11일 오전 10시 30분 실로암장로교회(담임 김종덕 목사)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했다. 강사로 초청된 권준 목사(시애틀형제교회 담임)는 '목회자의 창조적 변화'와 '교회 부흥의 3대원칙'을 주제로 오전, 오후 강의를 인도한다.
권준 목사는 "격려가 되고 함께 힘을 얻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며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행복한 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하며 목회자들이 행복해야 사랑의 메세지가 나오고,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의안 정리안이다.
먼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행복한 목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목회하면서 지금까지도 달려오셨지만 더욱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사랑의 메세지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게 삽시다. 아내의 얼굴은 남편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거울은 절대로 먼저 웃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행복할 때 행복한 가정과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함께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목회적 리더십'입니다. 행복한 목사가 줄 수 있는 리더십 말입니다.
21세기의 리더십은 '친밀감과 권위'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리더에게는 함께 진솔함을 나눌 수 있는 친밀감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을 안믿는 사람도 목회자에게 거룩함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도 이상한 모습이 많이 나오다보니까 목회자의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습니다.
거룩의 모양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다가갈 수 있는 친밀감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을 합니다. 페이스북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더이상 권위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솔한 대화가 오가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친밀감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목사나 나나 별로 다를 것이 없네' 이렇게 느끼면 안됩니다.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밥을 먹는데, 똑같은데 뭔가 다른, 뭔가가 느껴지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권위에서 옵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나 혼자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권위주의가 나쁜 것이지 권위는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오는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평신도와) 똑같은데 뭔가 다른, 그래서 평신도들이 그 가운데서 힘과 평안, 소망을 얻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21세기 목회자 리더십은 더 힘듭니다. 그러나 놓칠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친밀한 가운데 오는 영적 권위, 감동을 줄 수 있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 영적 권위는 말씀과 기도에서 오는 영적 권위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소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대할 것은 하나님 은혜, 기름부으심입니다.
제가 2001년 시애틀형제교회에 부임하고 지금까지 12년째가 됩니다. 시애틀형제교회의 부흥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제가 하나님 은혜 외에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여기에 대선배님들이 계시지만, 목회 내용을 설명할 수 있지만 하나님 은혜 외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 은혜인 것은 알겠는데, 그것 말고 어떻게 했습니까?" 한 번 더 물어봅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 은혜인데 정작 이 은혜에 대해서는 관심이 떨어집니다. 노하우에 관심이 더 있지 하나님의 전적인 기름부으심은 관심 없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과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는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놀라운 영적인
은혜,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을까요.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 마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을까요. '목자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놓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다윗은 양떼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던졌습니다. 다윗은 양이 사자나 곰에게 먹힐 때 싸우지 않았습니까. 양을 위해 생명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사자나 곰과 싸우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양 한마리 잃는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숨을 던졌습니다.
우라가 어떤 칭호보다 들어야 할 것은 '목자'입니다. 한영혼 한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삯꾼이 되면 안됩니다. 한 영혼을 위해 가슴앓이 할 수 있는 목자의 정신, 정말 저 분이 나의 목자인가 느낄 수 있는 목자의 마음, 정신을 놓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환란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목자로 만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만납니다. 자기 양을 보면서 목자가 무엇인지 삶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푸른 초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회복을 일으켜주실 것 믿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실 목자, 하나님을 목자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은,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푸른 초장으로, 목자이신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 각인시켰으면 하는게 바램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자리에 서면서도, 동역자고 선배목사님들도 있지만
행복을 함께 노래할 수 있고, 목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준 사명을 감당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변화에 대해서 주어진 시간에 나눠보고 싶습니다.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만히 있다고 안변하는 것 같지요. 가만히 있으면 현상유지 되는 것 같죠?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퇴보'라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해야 산다고 말합니다.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의 특징은, 무조건 변화를 싫어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기성교회도 부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시애틀로 이민왔습니다. 4년 학교 다니고 LA에서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1995년 온누리교회에 부임하게 되어 한국을 배우고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두란노 원목을 하면서 이민교회를 많이 가봤습니다. 이민생활이 그렇지 않습니까. 한군데 오래 살지,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미국 여기저기 더 많이 다닙니다. 이민교회를 방문하면서 기성교회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물을 드리고, 교회를 짓고 기뻐하며 성장과 부흥의 기쁨을 누리면서 신앙생활 했는데, 언젠가부터 교회가 고령화가 되어갑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교회가 다시 팔려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기성교회도 부흥해서 소망과 꿈을 나누고 섬기는 목회를 하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2001년 시애틀형제교회에 부임했습니다. 당시 28년된 교회, 제가 16년 전 학생으로 다녔던 교회입니다. 기성교회 전통교회도 변해서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와 역사가 얼마나 큰지, 너무 쉽게 변했습니다. 저는 모든 기성교회가 쉽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말씀도 전해달라고 하고 집회도 인도해달라고 해서 했습니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 부흥하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어떤 교회는 '이 교회는 예수님이 와도 어렵겠다, 쫓겨나겠다'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습니다. 시애틀형제교회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기성교회, 전통교회,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는 변화를 싫어합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있습니다. 고인 물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니까 우리도 변하느냐가? 아닙니다. 변질된 것을 본질로 바꾸는 것이 변화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게 편하다 하더라도, 본질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무리 익숙하고 편해도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하는 교회가 실패하는 이유는, 과거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시대 해왔던 구조나 모든 것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는가를 봐야합니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와야 하고,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2주 전에 40주년 예배를 드렸습니다. 40년이면 시애틀 교민 역사를 대변하기도 합니다. 이 역사와 함께 해왔다는 자부심이 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기념예배에서 "우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교회가 아니라 매년 진보를 어떻게 이뤄왔는지를 알아봐야 한다고, 패러다임과 사고의 전환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지 봐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구원의 역사를 펼쳐내고 복음의 진보를 이뤄내는지 봐야 합니다.상처의 회복과 하나님 은혜를 다시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나는가 봐야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건물이 아니라, 과거 인간의 자랑과 교만만 남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변화는 창조적 변화여야 합니다. 변화는 과거 시스템을 부수어야 합니다. 시스템을 새로 깔던지 업그레이드하던지 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벽은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안전과 보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벽의또 한가지 측면은, 그 벽이 나를 억압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가두고 맙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담으면 다 잃고 맙니다. 1차적인 것, 본질이 없으면 부대는 필요없습니다. 부대는 복음을 둘러싸고 형성된 조직, 향식, 형식, 문화가 부대입니다. 복음을 잘 지키고 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과 형식과 양식이 부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 부대가 어느날부터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고, 바리새인 서기관이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부대가 어느날부터 방해가 되면 안됩니다. 복음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능력이 있을 때 모양도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복음의 진보를 갖고오고 있는가, 복음의 진보를 위해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봐야 합니다.
권준 목사는 "격려가 되고 함께 힘을 얻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며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행복한 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하며 목회자들이 행복해야 사랑의 메세지가 나오고,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의안 정리안이다.
먼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행복한 목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목회하면서 지금까지도 달려오셨지만 더욱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사랑의 메세지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게 삽시다. 아내의 얼굴은 남편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거울은 절대로 먼저 웃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행복할 때 행복한 가정과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함께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목회적 리더십'입니다. 행복한 목사가 줄 수 있는 리더십 말입니다.
21세기의 리더십은 '친밀감과 권위'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리더에게는 함께 진솔함을 나눌 수 있는 친밀감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을 안믿는 사람도 목회자에게 거룩함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도 이상한 모습이 많이 나오다보니까 목회자의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습니다.
거룩의 모양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다가갈 수 있는 친밀감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을 합니다. 페이스북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더이상 권위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솔한 대화가 오가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친밀감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목사나 나나 별로 다를 것이 없네' 이렇게 느끼면 안됩니다.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밥을 먹는데, 똑같은데 뭔가 다른, 뭔가가 느껴지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권위에서 옵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나 혼자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권위주의가 나쁜 것이지 권위는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오는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평신도와) 똑같은데 뭔가 다른, 그래서 평신도들이 그 가운데서 힘과 평안, 소망을 얻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21세기 목회자 리더십은 더 힘듭니다. 그러나 놓칠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친밀한 가운데 오는 영적 권위, 감동을 줄 수 있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 영적 권위는 말씀과 기도에서 오는 영적 권위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소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대할 것은 하나님 은혜, 기름부으심입니다.
제가 2001년 시애틀형제교회에 부임하고 지금까지 12년째가 됩니다. 시애틀형제교회의 부흥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제가 하나님 은혜 외에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여기에 대선배님들이 계시지만, 목회 내용을 설명할 수 있지만 하나님 은혜 외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 은혜인 것은 알겠는데, 그것 말고 어떻게 했습니까?" 한 번 더 물어봅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 은혜인데 정작 이 은혜에 대해서는 관심이 떨어집니다. 노하우에 관심이 더 있지 하나님의 전적인 기름부으심은 관심 없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과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는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놀라운 영적인
은혜,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을까요.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 마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을까요. '목자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놓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다윗은 양떼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던졌습니다. 다윗은 양이 사자나 곰에게 먹힐 때 싸우지 않았습니까. 양을 위해 생명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사자나 곰과 싸우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양 한마리 잃는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숨을 던졌습니다.
우라가 어떤 칭호보다 들어야 할 것은 '목자'입니다. 한영혼 한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삯꾼이 되면 안됩니다. 한 영혼을 위해 가슴앓이 할 수 있는 목자의 정신, 정말 저 분이 나의 목자인가 느낄 수 있는 목자의 마음, 정신을 놓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환란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목자로 만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만납니다. 자기 양을 보면서 목자가 무엇인지 삶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푸른 초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회복을 일으켜주실 것 믿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실 목자, 하나님을 목자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은,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푸른 초장으로, 목자이신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 각인시켰으면 하는게 바램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자리에 서면서도, 동역자고 선배목사님들도 있지만
행복을 함께 노래할 수 있고, 목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준 사명을 감당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변화에 대해서 주어진 시간에 나눠보고 싶습니다.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만히 있다고 안변하는 것 같지요. 가만히 있으면 현상유지 되는 것 같죠?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퇴보'라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해야 산다고 말합니다.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의 특징은, 무조건 변화를 싫어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기성교회도 부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시애틀로 이민왔습니다. 4년 학교 다니고 LA에서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1995년 온누리교회에 부임하게 되어 한국을 배우고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두란노 원목을 하면서 이민교회를 많이 가봤습니다. 이민생활이 그렇지 않습니까. 한군데 오래 살지,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미국 여기저기 더 많이 다닙니다. 이민교회를 방문하면서 기성교회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물을 드리고, 교회를 짓고 기뻐하며 성장과 부흥의 기쁨을 누리면서 신앙생활 했는데, 언젠가부터 교회가 고령화가 되어갑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교회가 다시 팔려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기성교회도 부흥해서 소망과 꿈을 나누고 섬기는 목회를 하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2001년 시애틀형제교회에 부임했습니다. 당시 28년된 교회, 제가 16년 전 학생으로 다녔던 교회입니다. 기성교회 전통교회도 변해서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와 역사가 얼마나 큰지, 너무 쉽게 변했습니다. 저는 모든 기성교회가 쉽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말씀도 전해달라고 하고 집회도 인도해달라고 해서 했습니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 부흥하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어떤 교회는 '이 교회는 예수님이 와도 어렵겠다, 쫓겨나겠다'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습니다. 시애틀형제교회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기성교회, 전통교회,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는 변화를 싫어합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있습니다. 고인 물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니까 우리도 변하느냐가? 아닙니다. 변질된 것을 본질로 바꾸는 것이 변화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게 편하다 하더라도, 본질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무리 익숙하고 편해도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하는 교회가 실패하는 이유는, 과거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시대 해왔던 구조나 모든 것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는가를 봐야합니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와야 하고,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2주 전에 40주년 예배를 드렸습니다. 40년이면 시애틀 교민 역사를 대변하기도 합니다. 이 역사와 함께 해왔다는 자부심이 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기념예배에서 "우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교회가 아니라 매년 진보를 어떻게 이뤄왔는지를 알아봐야 한다고, 패러다임과 사고의 전환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지 봐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구원의 역사를 펼쳐내고 복음의 진보를 이뤄내는지 봐야 합니다.상처의 회복과 하나님 은혜를 다시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나는가 봐야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건물이 아니라, 과거 인간의 자랑과 교만만 남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변화는 창조적 변화여야 합니다. 변화는 과거 시스템을 부수어야 합니다. 시스템을 새로 깔던지 업그레이드하던지 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벽은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안전과 보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벽의또 한가지 측면은, 그 벽이 나를 억압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가두고 맙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담으면 다 잃고 맙니다. 1차적인 것, 본질이 없으면 부대는 필요없습니다. 부대는 복음을 둘러싸고 형성된 조직, 향식, 형식, 문화가 부대입니다. 복음을 잘 지키고 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과 형식과 양식이 부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 부대가 어느날부터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고, 바리새인 서기관이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부대가 어느날부터 방해가 되면 안됩니다. 복음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능력이 있을 때 모양도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복음의 진보를 갖고오고 있는가, 복음의 진보를 위해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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