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고뇌와 고통을 드러내는 이 말씀은 인간의 구원에 얽혀진 하나님의 사랑의 신음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중 어떤 이들은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47). 그러나 그 소리는 절망에 빠진 한 인간의 고뇌의 신음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버림받고 거절 받은 낙심의 신음소리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버린 현실에 대하여 분을 이기지 못해 분노하는 마지막 절규를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 이상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사53: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한 인간의 거절의 고뇌와 사람에게 버림받고 매질 당한 한 인간의 고통의 신음소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말로 이루 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시던 주님과 단절되어야 하는 고통은 곧 그에게 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의 대가로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최고의 슬픔은 사랑하는 이를 먼저 죽음으로 먼저 떠나 보내었을 때입니다. 혹은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의 슬픔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던 주님과 떨어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죽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빼앗겼을 때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을 받을 때의 고통입니다. 바로 그 고통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유신의 고통이 첨가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글에는 그의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매질을 당할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시편에는 그의 뼈들의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모든 뼈마디 마디마다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고통과 깊이 박힌 창 자리는 오히려 그의 고통을 가중 시켜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자신에게 부여된 고난의 메시야라는 예언을 고통으로 다 이루심을 스스로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의 절규는 그것을 의미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절규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통으로 얻은 아들이 병에 들어 죽게 되자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그의 아들은 죄의 대가로 죽었습니다. 그 때, 그가 외친 이 슬픔의 표현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습니다.
다윗에게 그의 아들이 죽은 것 같이 예수에게 그의 자녀 또한 죽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자녀들에게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이방인들을 교사하여 마치 “바산의 황소들이 나를 둘러쳤나이다”라고 말한 예언대로 로마인들을 시켜 자신의 아버지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은 마치 자녀와도 같았습니다. 그의 친애하는 백성이며 곧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지금 아버지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바로 부모를 죽이는 불효 막심한 폐륜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죽은 슬픔이었습니다. 마치 다윗이 자기 자식이 죽었을 때의 고통이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 고통을 다윗의 입술을 빌려 예언한 대로 외치셨던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친애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대변하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독생자를 죽여야 하는 고통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쳤을 때,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 역시 아들을 죽여야만 되는 슬픔을 아브라함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은 아브라함을 자신의 가장 깊은 속내를 아는 이 곧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이 말로부터 성부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식을 죽여야만 하는 아버지의 고통이 이 말에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 가는 자신의 아들이 자기에게 드리는 마지막 절규에 대한 답변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바로 그 하나님의 고통을 유발하고 있는 소리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의 고통을 자신의 말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자신의 고통소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잘 쓰고 있던 언어의 유희를 통해 자신의 신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을 담은 고뇌의 소리를 이스라엘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후 일에 그 고통의 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께로 나아올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을 듬뿍 담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이 고통의 소리는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던 한 인간의 고뇌와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던 친애하는 이로부터 거절되고 단절되어야 하는 고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이 고통의 말은 그의 육신의 처절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살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과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맞은 매질, 그리고 피흘림과 가시 면류관, 못 박히는 손과 발, 그리고 육중한 몸이 단지 몇 군데의 살에 박힌 못을 의지하여 십자가에 달려질 때 짖어지는 살의 고통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또한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고통이 그대로 묻혀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의 패륜적 행위를 보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고뇌, 그리고 자기 백성이 자기를 죽이는 고통이 이 말을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본 뜻이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고통을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지 이것만으로 자신의 의미를 다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의 침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아들의 절규를 통해 아버지의 고통을 드러내는 이중언어이며, 또한 응답할 수 없는 아버지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처절한 신음소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이야기는 무엇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까? 그의 처절한 죽음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로서 예수님의 고통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까? 역시, 그렇습니다. 물론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 역시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고뇌와 고통에 찬 소리가 나와 그리고 우리 자손들에게 단지 과거에 일어났단 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들리는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절규”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호환 박사의 신학단상 (2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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