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감각의 시대라고 한다. 내면의 깊은 묵상이 상실되고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감각적 문화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교회는 어떤가? 한편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 시청각 예배라든지, 혹은 화려한 조명과 음악을 예배에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감각적 예배가 거룩을 체험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독일보에서 연재하는 주인돈 신부의 칼럼 <감각, 영성 그리고 초월>은 하나님이 주신 감각이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게 하는 신앙의 매개체라고 주장한다. 이 글은 진정으로 깊은 신앙과 영성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만남이라는 기초 위에 적어도 현대인들보다 수천년 전부터 하나님을 섬겨 왔던 신앙인들이 감각을 통해 어떻게 예배해 왔는지를 전통적, 성서적 측면에서 조명하고 우리도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감각으로 만나게 이끌어 줄 것이다. <편집자 주>

향(4):기도의 상징으로서 향: “마음을 드높이, 주를 향하여”


거룩한 연기로 인간의 몸과 영을 드높이

아름다운 채색의 빛이 흩뿌리듯이 그리고 조용히 스며들듯이 비춰온다. 교회 높은 창문의 스테인 글라스의 아름다운 채색이 오전 성찬예배를 드릴 때쯤이면 빛을 통하여 스며든다. 그 색상은 서로 어울려 부드러우면서도 신비스러워 어떤 색상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그 채색광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채색의 빛이 교회 성전 제단 앞에 비스듬하게, 위로부터 아래로 걸쳐 있다. 그리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의 삼성경(거룩하시다:Sanctus)을 노래할 때면 복사(acolyte)는 유향을 피운다. 그러면 그 향은 조용히 알 수 없는 형체를 이루면서 그리고 또 다른 형체로 변하면서 스테인글라스의 채색의 빛으로 올라가면서 연기와 빛의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면서 연기는 계속 올라간다.

내가 학생시절에 예배를 드린 인천 자유공원 근처에 있는 인천 내동교회, 처음 신부가 되어 일한 덕수궁 옆에 있는 서울대성당, 그리고 뉴욕에 잠시 몇 개월 체류하면서 예배드린 뉴욕의 성요한 대성당(St. John Divine Cathedral) 등에서 경험한 유향은 신비 그 자체로 거룩함으로 인도한다. 이들 교회는 높은 천정과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의 창을 가지고 있다. 향이 피어오를 때에 스테인 글라스를 통하여 비취는 아름다운 채색의 광선을 통과하여 오르는 유향의 연기는 그 자체를 보는 것으로 신비스럽고, 경건함으로 인도하고, 마음 바탕 깊은 곳에서 기도하도록 인도한다. 그 어떤 사람이 유향의 신비와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도 기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유향을 피워놓고 그것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를 할 때에 우리의 영적인 기운과 분위기를 돋구어 주고 더 깊은 기도로 인도한다. 유향을 통하여 이 지상적 실제를 천상적 실제로 변화시키는 영적인 영감을 얻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또는 개인적으로 기도를 드릴 때에 향을 피우고 그 향의 냄새를 맡으며, 그 연기의 자유로움으로 올라가는 형태를 보면, 우리의 기도를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하게 된다.

기도의 상징으로서 향

성서에서 인간은 향을 피우며 기도하고 제사를 드렸다. 하느님은 그 향의 아름다운 냄새를 맡으셨고 인간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므로 향은 하느님과 인간이 교통하는 상징이며,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상징인 것이다. 향이 피어오르면서 변화되는 모습,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은 바로 이 세상의 우리의 기도가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의 상징적 의미로 모든 종교에서 사용되어졌다. 중세 유다교의 신학자였던 이븐 에즈라(Ibn Ezra)는 개인의 종교적 수양을 위해서는 후각(향)이 시각보다 훨씬 더 신뢰하고 의존할만하다고 하였다. 성령은 달콤한 향이 발산되는 반면 죄악은 악취가 풍긴다고 하였다. 향은 히브리신학과 관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영혼과 육체를 이어주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다.

루가복음 1장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을 한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즈가리아는 성전에서 분향할 때에 천사가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루가복음 1장은 "분향"이한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고 있다. 이는 그가 분향을 하면서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직무를 드릴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즈가리아와 대화하시고 만나 주신 것으로 이해를 하면 좋을 것같다. 다시 말하여 제사장 즈가리야는 분향하는 동안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고(루가1:8-23), 분향은 곧 기도의 상징, 하느님께 드리는 대화와 만남의 사건이 되었다.

구약성서는 곳곳에서 향을 피우며 기도하는 모습을 말해준다. 성막의 분향단의 향은 아침저녁으로 피워야한다. 분향단의 향은 기도의 향연을 의미한다. 향연이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이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론은 그 분향단 위에다가 향기로운 향을 피워야 하는데 아침에 등잔을 손질할 때마다 피워야 하고, 해거름에 등잔불을 켤 때에도 피워야 한다. 이렇게 너희는 향기로운 향을 야훼 앞에서 대대로 항상 피워야 한다.” (출애30:7-8)

"유딧은 땅에 엎드려 머리에 재를 뿌리고 속에 입고 있던 베옷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바로 그 때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에서 저녁 향을 태우고 있었는데, 유딧은 주님을 향하여 큰소리로 이렇게 기도하였다."(유딧9:1)

"나의 기도 분향으로 받아주시고 치켜 든 손 저녁의 제물로 받아주소서."(시편141:2)

그리고 신약 성서, 특히 하늘나라에서의 예배를 묘사한 요한 묵시록에는 향은 성도들의 기도임을 분명히 말하고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받아들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요한묵시록5:8)

"다른 천사 하나가 금향로를 들고 제단 앞에 와 섰습니다. 그 천사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향에 섞어서 옥좌 앞에 있는 황금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의 손으로부터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요한묵시록8:3-4)

그래서 우리는 향을 피우면서 우리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처럼 올라가기를 소원한다. 박희준은 우리 선조들이 향을 피우고 기도했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제를 올리거나 책을 읽거나 수행을 하기에 앞서 향을 피웠다. 왜 향을 피웠을까? 좋은 향기는 깊은 호흡을 가능케 하게 한다. 마치 우리가 깊은 산의 울창한 숲 속에 들어갔을 때 저절로 심호흡을 하는 것처럼, 그 호흡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고 그 안정 속에서 보다 깊은 명상과 사색이 가능해진다. ... 불교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예불문의 첫 서두에서 청정한 계율의 향기와 선정(선정)에 이르는 마음의 향기를 올린다. 이 때의 향은 우리가 육신으로 인식할 수 있는 향기가 아니라 정신의 향기를 말한다.”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성서에서도 그리고 교회의 예배 전통에서도 향은 기도를 도왔고 향을 피우는 것은 기도의 행위였던 것이다. 주일 날 유향을 피울 때마다 향의 연기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향의 아름다운 냄새로 인간 육신의 영은 더욱 활성화되고, 향의 연기와 더불어 우리의 기도, 깊은 속마음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기를 기도한다. 유향의 연기와 더불어, 마음을 드높이, 주를 향하여 나아가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