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Ich und du)'의 작가 마틴 부버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했다. 모든 언어와 개념의 공통 분모라고 할까. 모든 것의 원점이 '나'이다. 좋다, 나쁘다의 감정도 내게 좋게 또는 나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가정의 성패도 직장의 성패도 사회의 성쇠도 '나'로 기인한다.

그럼 '나'는 누구일까? '나'의 주소는 영혼(마음)을 주인으로 모시고 육체의 집에 살고 있는 존재이다. '나'라는 존재는 마음이 주인이며 육체는 거주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집이 좋고 나쁘고, 크고 작고가 아니라 그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이 문제다. 주인이 집을 잘 다스려야 집이 깨끗하고, 평화롭고, 잘서있고, 행복하며, 보람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과학문명의 최첨단을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 지금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육체의 주인인 마음에 무엇이 위치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어떻게 먹고 입으며 살 것인가 하는 의식주의 염려가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명예와 인기를 얻기 위한 욕망만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허무주의 감정이 주인이 되어 있는 자도 있고, 어떤 이들은 남의 것을 속이고 도적질해서라도 살면 된다고 하는 사단의 생각이 마음에 위치하고 있는 자도 있다. 마음의 주인에 따라서 인격의 형성이 나타난다. 즉 육체의 집, 모형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개미와 같은 사람, 즉 먹고 입고 살기 위해서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일이 목표가 되어 있는 사람, 둘째는 거미와 같은 사람, 즉 거미줄을 치고 무엇이 걸려들도록 올무를 놓고 기다렸다가 잡아 먹는 사람, 셋째는 꿀벌과 같은 사람이다. 꿀벌과 같이 꽃가루를 묻혀 주면서 꽃의 번식을 돕는 한편 꽃에서 꿀을 따는 상호유익을 주고받으며 사는 자를 말한다.

잠깐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보자. 지금 내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어느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의 임시 주소인 육체가 썩어지고 나의 주인인 마음도 사라질 때 나는 어디서 살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나의 마음에 거룩한 영이 자리잡지 않는 한 나는 표류자요, 방랑자요, 실패자일 뿐이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에 태어났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