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편 - #2.>
탄자니아(Tanzania)는 원래는 탕가니카(Tanganyika)였는데, 잔지바르(Zanzibar) 와 병합하여 탄자니아(Tanzania)가 되었다.

1650-1860년 노예무역이 이뤄지고 있는 흑암과 절망의 아프리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며, 노예무역 반대 투쟁을 100년 동안 벌여 쟁취시킨 선교사들이 탄자니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선교사 리빙스톤: Dr. David Livingstone (1813. 3. 19. – 1873. 5. 1)

그의 선교는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새로운 사람들을 기독교도 인으로 바꾸는 확신과 노예제도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탐구의 영감이었다.

리빙스톤은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의 글라스고우 남 지방의 작은 고을 블랜티르 (Blantyre, south of Glasgow)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에 목화공장에서 아침 6:00부터 밤 6:00 혹은 8:00까지 일하고, 밤에는 8:00 부터 10:00까지 야학으로 공부했으며,1836년 Glasgo University 의 Anderson’s College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원래는 중국 선교사를 지원했는데 아편 전쟁으로 좌절되었고, 1841년 28세 나이에,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게 되고, 남아프리카(South Africa)의 Kuruman에서 사역하는 Moffat의 약속을 받고, 남아프리카(South Africa) Algoa Bay 에 상륙, 내륙의 칼라하리 사막(Kalahari Desert)에 정착한다.

그는 29,000 Miles의 아프리카 여행을 하였는데, 황소 마차(ox-wagon), 말(horse), 혹은 걸어서(foot), 여행을 하였다.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빨리 이해하게 되었고, 동정하게 되었다. 열정적으로 선교하다가 사자에게 왼쪽 팔을 물렸으며, 보어전쟁(Boer War)으로 집이 무너지기도 하였다.

* 앵글로 - 보어 전쟁
Boers의 농부들이 성공적으로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 트란 스발 , 그들의 독립을 다시 만들었다.

1842년에서 4년 동안 잠베지 윗쪽(Upper Zambezi)에서 연안(해안)까지 이르는 길을 찾기위하여 탐구를 시작하였고, 1845년 선교사의 딸 Mary Moffat 과 결혼한다.

1849년과 1851년 리빙스톤은 칼라하리(Kalahari)사막을 가로질러
윗쪽 잠베지 강(Zambezi River)까지 두번째의 여행을 하면서, 중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 대한, 서양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중 차이가 큰 것들을 메꿔주었다.

1855년 리빙스톤은 장관(거대한) 폭포를 발견하고, 빅토리아 폭포('Victoria Falls')라고 명명했고, 1856년 5월 인도양에 접한 잠배지 입구에 도착,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남아프리카를 가로지른 사람이되었다.

잠시 영국으로 귀환한 리빙스톤은 영국 국가의 영웅이 되었으며,
많은 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였고, 1857년 그의 출판 저서 “선교사의 여행들 과 남 아프리카 의 연구” ('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1858년 리빙스톤은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갔으며, 향후 5년간 영국 정부를 위하여,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를 공식탐험을 하였다.

1862년 그의 부인이 말라리아로 죽으므로 쓰라린 타격을 입게 되었고, 1864년 영국정부로부터 요청받은 여행의 결과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집에서 리빙스톤은 노예무역의 공포를 공개적으로 공개했고, 중앙 아프리카의 다른 원정을 위하여 개인적인 후원자들을 확보했고, 나일강의 근원을 수색하며, 더 나아가서 노예제도를 신고했다.

리빙스톤의 마지막 여행은 1866년부터 1873년 리빙스톤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수개월 동안 그의 소식이 두절되자 1869년 뉴욕 헤럴드의 사장 J.G. 베네트 의 ‘리빙스톤을 찾으라’는 밀명을 받은 영국 출생의 미국 시민권자요 탐험가요 기자(journalist)인 헨리 스텐리(Henry Stanley)가 1871년 3월 아프리카로 건너가 온갖 고생을 이겨내고,
10월 탕가니카호 (Lake Tanganyika) 근처의 우지지 마을에서 병에 걸려있는 리빙스톤을 찾아 만난다.

그 때 헨리 스텐리가 감동 어린 목소리로 "리빙스턴 박사가 아니십니까? 제가 감히…"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리빙스톤은 지속적으로 나일강의 근원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 헨리 스텐리는 나일강의 근원인 빅토리아 호를 발견하게 된다.)

수년간 건강의 악화로 1873년 5월 1일 리빙스톤은 사망하게 된다.

리빙스톤이 죽자, 그의 시신 가운데 그의 심장을 뽑아 그가 죽었던 집 근처의 나무 아래 묻고 그의 시신을 박재한 후 그의 일생을 보좌하던 2명의 토인이 9개월간 그의 시신을 끌고 1,500 마일을 오늘날의 잠비아에서 탄자니아의 바가모요까지 이른 후 배로 운송, 영국에 이르게 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에비(Westminster Abbey)에 안장되었다.

▲리빙스톤의 시신을 박재하여 모포로 포장한 후 잠비아에서 바가모요까지 9개월 동안 1,500 마일을 토인 2명이 끌고 왔다

▲리빙스톤의 시신이 이 문을 통과해서 지나갔다

▲문을 통과하면 Anglican 교회 성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리빙스톤은 Red Carpet 위를 지나갔다

▲Anglican Church 를 통과하면 이 바닷가가 나오는데 이 바닷가에서 배로 약 2개월을 항해한 후 리빙스톤의 시신이 영국 런던에 도착하게 되었고, Westminster Abby에 안장되었다.


탄자니아(Tanzania)의 바가모요(Bagamoyo)에서 리빙스톤의 마지막 여정을 지켜보면서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성구가 떠오르며, 남은 후반전에 대한 재헌신의 감격이 임하게 되었다.

두번째 천주교(Roman Catholic) 선교사들

Roman Catholic Church 의 선교사들이 탄자니아로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1860년에 노예무역의 본산지 였던 잔지바르(Zanzibar)에 도착,
1868년 바가모요(Bagamoyo)에 도착
1889년 다레살람(Dar Es Salaam)에 도착

카톨릭 교회의 선교 및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한 부지를 크고,넓게 잡은 다음, 먼저 성전을 건축하고, 신학교를 세우고, 공동체를 위한 영농을 통하여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아프리칸들에게 교육을 통하여 서구 문명을 접하게 하였으며,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벌리면서, 노예들을 돈을 주고, 해방시켜서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게 하며, 비밀 땅굴(Tunnel)<자동차 1대가 다닐수 있는 폭으로>을 바닷가까지 뚫어 놓았고, 노예들이 도망하여 이 Tunnel을 통하여 카톨릭 공동체 안으로 숨어 들어와서 구약의 도피성처럼 살게 만들어 주었다.

▲카톨릭 교회의 탄자니아에서의 팽창

▲공동체 생활이 시작됨

▲성전을 건축했다

▲학교를 세움

▲공동체 생활처소

▲비밀 땅굴 Tunnel – 도망나온 노예들이 이 Tunnel 을 통하여 공동체로 숨어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