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 곧 성령의 은사(Charismata)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사에 대하여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정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은사의 진정한 목적과 교회에서의 위치를 설정해 주기 위해서 위해서입니다.
1. 우선 바울은 모든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4)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으로부터 기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은사의 혼란과 과용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들의 은사들의 적법성과 그 근거들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선 바울은 그 신령한 것의 기원이 ‘우상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것이요, 또한 성령에 의해 주라 시인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라’(1-3)고 말합니다. 이는 성령의 은사 자체를 부인하는 모든 자의 입을 막으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충고는 은사를 소지했다고 믿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너희가 지닌 모든 은사가 진정 하나님께로 왔다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7)이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은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덕을 세우고 또 한 유익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은총(Charis)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소속되었는가로 자신들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지도자들을 선호하였고 그들을 자신이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부류에 속함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보상받으려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로다”(3:6,7)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부의 정도에 따라 무리를 지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하나 됨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2. 바울은 성령이 우리에게 나타남은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라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4-6)라는 바울의 주장은 “여러가지”로 갈라져 있는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나로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각 사람의 은사가 달라도 그 은사의 주체가 되시는 성령님은 한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은사가 곧 직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사람이 교회에 무슨 직임을 가졌든지, 혹은 그 직임 간에 어떤 차이가 있든지 간에, 오직 모든 은사를 소지한 사람들은 주님의 발령으로 세움을 입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령자가 자신의 뜻대로 위임해 주었다는 것(11)을 잊어버리면 서로 비교하게 되고, 교만하여 자기 은사만을 자랑하며 주장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뜻이 부여되는 장소로 교회를 하나님은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교회는 마치 큰 나무와도 같아서 많은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하나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은사가 가지처럼 많을 지라도 한 줄기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줄기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공통적인 신앙고백은 우리의 뿌리에 해당합니다. 같은 출발을 가지고도 우리는 하나 되기를 거부합니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는데도 자신의 교파와 교리와 신학적인 주장으로 인해 도무지 다른 이의 생각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해석이 성경적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이권과 자기주장에 빠져 뿌리를 작은 가지에 편입시키려는 우를 범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3.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곧 모든 이를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모든 이를 유익되게 한다’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 16장에 7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별사에서 이미 언급된 말씀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이 오시는 일이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보다 유익된다는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유익된다’는 뜻을 생각해 보면 해석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단지 보탬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준다는 뜻을 말합니다. ‘숨페로’(sumphero)라고 쓰여져 있는 이 말씀은 분명히 모든 것을 가져다준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입니다. 예수님이 계셔도 그의 육체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주실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으로 계시면 그것은 가능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단 하나님의 육체로 계시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가운데 사는 우리는 예수님과 만남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제한적이 됩니다. 이 모든 문제는 오직 성령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진실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심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 즉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하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왜 오늘날 교회는 모든 은사자들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습니까? 교회에 해약을 끼치는 분들만큼이나 오늘날 주의 성령을 가진 분들 때문에 교회는 고통을 앓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사가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을 위해 쓰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모든 은사는 거룩하신 주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성령은 그의 보내신 영이시며 또한 아버지는 은사의 진정한 근원지이며, 또한 모든 은사를 우리에게로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은사의 하나 됨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혹은 어떤 이들은 주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좋지 않는 뜻으로 ‘무당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 은사의 주체이신 성령님을 노엽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혹은 역사적인 증거가 빈곤한 신학적인 편견을 통해 오늘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더욱 성령을 슬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은사자들은 성령이 하시는 충고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히 무당과는 달라야 합니다. 복채 때문에 점을 치는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또한 귀신이 들어가서 영험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강요하고 잘못된 위엄을 보이는 것은 귀신에게 속한 증거입니다. 이와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거룩한 영을 모신 자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면 이는 더욱 우리 속에 계신 이를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시기를 원합니다. 모든 은사로 나타나시어 자신의 일, 즉 그리스도를 세우시는 일을 하시려 합니다. 교회를 유익되게 하시는 일이 곧 그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깨끗이 하여 우리 가운데 성령의 나타나심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김호환 박사의 신학단상 (19) 성령의 나타나심(고린도전서 12장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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