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에 불어닥친 대중전도운동은 폭팔적인 교인증가와 아울러 뜻하지않게 성경공부운동과 제자훈련이란 대 영적 수확을 한국교회에 선물로 안겨주었다.
주먹구구식의 구역공과가 다분히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계단공과로 탈바꿈하면서 그토록 경원하며 심지어 이단시하던 교회밖 운동들 일테면 C.C.C나 U.B.F.나 Navigator 선교부의 성경공부교제들에 도움을 받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였다.
이후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교단내 교육부의 공과들은 이들 교제의 변형에 불과하였다. 이런 열기는 누구의 주장처럼 평신도를 일깨우는 촉매제가 되었으며 때마침 경제적 호황의 물결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기독교문서 출판은 수많은 경건서적들과 성경해석을 용이하게 하는 참고서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동안 강단이 곧 말씀이며 주석이던 시대는 물러가고 사도행전 17장11절의 말씀대로 그런가 아닌가를 따지는 평신도들의 열심은 강단으로 하여금 혼비백산케 하였다. 이렇게 깨어난 평신도들을 성공적으로 지도한 면면들이 오늘날 소위 강남의 대 교회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양적, 질적성장이 밀월동반으로 십 수년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이성중심의 교회 양육은 지도자나 평신도나 간에 영적공허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필연으로 가분수 그리스도인들이 비 윤리적인적 행위들을 쏟아내어 반 사회적 주범들로 각인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작금에 당황한 한국 교회는 다시금 그 해결책으로 영성운동에 정성을 쏟고 있다. 예전에 말씀이 주제였다면 이제는 단연코 영성이 주제이다.
그런데 이 영성이란 것이 아리송한 것이어서 신학적, 교리적 체계없이 다분히 감성적 기초아래 아무나 쏟아내는대로 영성신학이라 하니 백가쟁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운동이 제자화나 육성운동에서 보여준 문제를 재현하지 않으려면 영성을 말하며 영성을 지도하는 자들에 대한 인성을 분별하고 그 진위를 가려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기도 많이 한다면서 거짓말을 물먹둣이 하는 사람, 성경을 외골수로 풀이하면서 영성운운하는자, 상식이나 일반 윤리를 무시하면서 막무가내식으로 영적권세를 뽐내는 자는 영성운동에서 퇴출시켜 마땅하다.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일수록 변화된 삶을 통해서 휼륭한 인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참 슬프게도 영성을 말하는 분들 가운데 이런 균형잡힌 인성을 보여 주는 분들을 찾기 어려우니 이 영성운동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이런 때 한국교계에 안셀무스와 같은 지도자의 출현이 고대된다. 안셀무스는 정치적으로는 캔터베리대주교였으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위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하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인물이다. 그는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유명한 명제를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대주교로 서임되기 위해 런던에 오기전에는 그의 영적, 학적 스승이자 전임 대주교였던 랑프랑이 원장으로 있던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그는 그곳에서 랑프랑의 매우 탁월한 지적 능력과 더불어 깊은 신앙심을 전수받아 나중에는 수도원장으로 봉직한다.
이 때 저술한 그의 책들은 수도승다운 도덕적 훈계와 영적 성숙, 그리고 수많은 독서를 통한 명상의 깊은 향기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신비주의적인 믿음 만능주의를 벗어나 오직 말씀의 기초 위에서 올바른 신앙관으로 다져지기를 촉구했던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영성지도자들에게서 이런 영성과 인성을 겸비한 인물을 찾아 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