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40을 넘겨 아버님과 어깨를 맞대고 시작한 새벽 산행.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색함도 따라왔습니다. 물론 아버님과의 새벽 산행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한 3년 정도 아버님을 따라 동네 앞산을 올랐던 기억이 있으니까요. 그때 제가 본 것은 아버님의 등이었습니다. 긴 보폭으로 앞서가시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질까봐 어둑한 새벽 산길을 종종 걸음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를 핑계삼아 중단했으니 30년이나 묻어두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걷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깨와 어깨 사이를 어색함이 채우고 있는 겁니다.
어색함의 이유를 짚어보았습니다. 주범은 대화였습니다. 나란히 걷게되자 대화가 필요해진 겁니다. 그런데 아버님과 주고받는 문장들이 부자연스럽기만 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숙성된 소재들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귀동냥한 사건사고들을 입술만 울려 나누는 대화…차라리 대화 사이 잠간잠간의 침묵이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문득 ‘나이 40이 되도록 아버님과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슬프기도하고 죄송스런 마음도 들었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님의 발걸음이 곧바로 집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가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가시기에 ‘뭐 필요한 물건을 사시려나 보다.’ 생각하며 뒤 따랐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의 발걸음이 엉뚱한 장소에서 멈췄습니다. 전신주 앞이었습니다. 보안등 하나를 달고 있는 전신주였습니다. 그 전신주에 다가가신 아버님은 뒷부분에 위치한 스위치를 내려 등을 끄셨습니다. 그리곤 바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제 호기심을 눈치채신 아버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도 저 등이 켜져 있는거야. 그래서 몇 달 전부터 내가 이 등을 끄고 있지. 5분 더 걸으니 건강에 좋고 전기세 절약해서 나라 살림에 보탬도 되니 일석이조 아니냐.” 그 다음 날부터 아버님의 어깨와 제 어깨 사이를 샘내던 어색함은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주일이면 떠올리게 되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9년 전 한국 방문 중에 경험한 이 추억을 통해 ‘난 좋은 아들이며 아빠인가’ 묻곤 합니다. 올해는 영적 아버지와의 관계도 점검해 보았습니다.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어깨를 맞대고 대화하며 산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입니다. 성경을 펼쳐 읽고 묵상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사랑스런 음성으로 말씀해주십니다. 대화 중 우리의 어깨를 다독이시거나 끌어안으시는 그분의 따스한 손길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도 좋은 대화의 방법입니다. 겸손하게 무릎 꿇을 때, 우리와 영적 산책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발소리를 듣게 됩니다. 처음엔 어색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색함은 자유함과 평화로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어깨를 맞대고 대화하며 산책하는 즐거움이 저를 포함한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