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남 을 정죄하고 판단하기를 좋아 합니다. 특별히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난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덜미라도 잡은 듯 고난의 대상을 평하고 비난하고 헐뜯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해결 받지 못한 죄의식과 미움과 시기와 열등의식이 있고 그러한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감추면서 '거룩'을 위장하게 됩니다.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평토장한 채 '거룩'을 가장하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자신의 거짓 우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서 자신에게 돌릴 자책과 죄책을 남에게 돌려 정죄하고 짓밟고 헐뜯고 파괴시키려고 합니다. 더욱 깊이 서려있는 그 비방과 정죄 속에는 용서받지 못한 자신의 죄가 빛 에 드러날까 봐 두려워떠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허물을 캐며 심판을 전가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거룩'을 위장한 어느 자칭 '진실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는 아내를 두고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습니다만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잘 피해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향한 행위는 화인 맞은 양심 속에 묻어두고 사냥개처럼 음란죄를 뒤집어씌울 대리 대상을 혈안이 되어 찾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곤궁에 처해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에게 자신의 더러운 것을 전가시키려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습격당한 인생의 폭풍 때문에 안정을 잃었고 재산도 가장도 건강도 잃어 파멸 속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만 더 나아가 그 사냥꾼에게 물어뜯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깊숙이 감추어두고 있는 자신의 음란 죄 를 그 여인의 것이라고 정죄하고 판단하며 수년 동안 지칠 줄 모르고 비방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자기 대신 그녀가 돌 에 맞기를 원한 것 입니다. 자신의 죄 는 덮어두고 가장된 '거룩'으로 연약한 그녀에게 대신 돌을 던지며 자시의 양심과 사람들의 눈 을 속이려 한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심리학에서는 '투사' 라고 합니다. 자기의 것을 남에게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그 깨끗한 마음을 보지만 도둑은 다른 사람에게서 '도둑심보' 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죄 없는 예수님에게 죄의 누명을 씌우고 못 박아 죽인 죄인들이 그랬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어다놓고 정죄하고 판단하며 돌을 손에 든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녀와 음란행위를 일삼던 남자들은 그녀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들 속에 있는 음란죄를 그녀의 죽음으로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거룩' 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들의 눈 을 계속 속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다 어디에 있느냐?"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리' 앞에 선 자신들을 깨우치며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정죄하고 판단할 수 가 없게 됩니다. 자신이 바로 자신이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는 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특별히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더욱 쉽게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죄 값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교만하더니만..." " 아 그 사람, 배웠다고 거들먹 거리더니 하나님이 낮추시는 것이지..." "돈이 있다고 없는 사람들 무시하더니만 쫄딱 망하는 꼴을 보니 하나님은 공평하신 것이야 쯧쯧..."

이러한 행위 속에, 역시, 자신 속에 숨어있는 죄악된 자신들을 빛 앞에 내어놓기 싫어 어둠속에 감추어 놓고 다른 사람들이 대신 돌을 맞아주기를 원하는 악한 심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말씀에 보면 개인들이 저지르는 죄악 때문에 패망한 경우를 보여 줍니다. 국가도 죄악 때문에 망하고 임금들도 포악 하면 하나님의 벌 을 받았습니다. 교만해서 망하고 게을러서 망하고 사치해서 망하고 강퍅해서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지은 무리들이 그 죄 값을 치룰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죄악을 계속 쌓아 놓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 속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즉시 재앙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랜 시일 후 에 망하는 경우 때문에 마음 놓고 죄를 거듭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악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해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죄악의 대가로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어 사망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오직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입은 사람들만 '의인' 이라는 도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의인'으로 인정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욥 의 말씀은 남을 무지하게 함부로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말 은 모두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을 향한 그의 판단과 정죄는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방의 의인" 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 욥 을 향하여 그의 '악'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결국 하나님 앞이나 욥 앞에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의 말씀과 정의를 들고 잘못 이웃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 을 판단할 때도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입법자와 재판 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약 4:12)

오직 하나님만 정죄하시고 판단하실 분이시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들' 이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입은 '구원받은 죄인들- 곧 은혜로 의인이 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그 아무도 판단하고 정죄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할 때 죄를 더욱 쌓아 올릴 뿐입니다. (롬 1:28-32)

그리고 '의인' 도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욥 이 의인이면서 고난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의인이 된 성도들도 고난을 받습니다. 그 고난은 '죄악'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과 유익을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정죄와 심판의 대상들이 아닙니다. 의인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의인된 죄인들로서 누구도 정죄하고 심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영역입니다.

사도들 모두 고난 속에 순교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실한 교인들도 핍박당하고 또 순교 당했습니다. 오늘도 의인의 고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함부로 이웃의 고난을 보고 '죄 의 삯' 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에게 돌 을 던지셨다면 훗날 엘리바스처럼 하나님께 잘못을 책망 받고 자신이 심판하고 정죄한 그 의인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하며 그의 축복기도를 의뢰해야 할 때가옵니다.(욥 4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