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3일은 우리 경은이가 이 세상에서 맞이한 첫 번째 생일, 첫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지만 경은이도 하나님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섭리로 이 세상에 태어나 어느새 그 첫 해를 지낸 것입니다. 지나간 일 년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한 가지도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경은이가 살아온 지난 한 해동안의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모든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이 그렇듯이 경은이도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관여하시는 과정을 거치며 세상에 태어났는데 지금도 경은이가 태어나기 전날 밤, 마음 조이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일이 또렷하게 기억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태어날 아이의 신체 부분 부분을 떠올리며 기도하는데 혹시라도 내가 간구하지 못한 부분에 이상이 생길 것 같은 마음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 몸의 모든 부분들을 할 수 있는 만큼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간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병원에 있던 집사람으로부터 “아이가 안 좋다”는 한마디의 전화를 받고부터는 아이의 생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매달려 기도했었습니다.
24시간의 진통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제왕절개수술을 하고서야 아이가 태어났는데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쁨도 컸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어렵고 힘든 산고를 겪은 내 딸에 대한 애처로움이 제 마음에 훨씬 더 크게 자리했었습니다. 그 후 딸네 집에 드나들거나, 딸아이와 함께 밥 먹기 위해 식당에 갔다 누구라도 만나게 되면, 으레 사람들은 저보고 ‘할아버지가 되더니 손녀가 그렇게 예쁘고 좋으냐, 경은이가 그렇게도 보고 싶으냐’고 했는데, 물론 새로 태어난 경은이가 예쁘고 또 그 아이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제 마음에는 경은이를 키우느라 애쓰는 내 딸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조금 더 많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 딸에 대한 저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경은이가 자랄수록, 그리고 경은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아이를 통한 기쁨과 즐거움은 갑절에 갑절을 더 해 갑니다. 이러한 경은이에 대한 마음은 저만이 아니라 집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경은이네로 직행을 하고, 컴퓨터나 전화기에 경은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저장해 놓고 수시로 보는 것은 기본이요, 아예 컴퓨터와 전화기 배경화면을 경은이 사진으로 설정해 놓고 항시 그 아이의 모습을 보는데 그게 그렇게 좋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지난해는 여러 가지로 참 많이 힘들었던 해였습니다. 그래서 목회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민할 만큼 어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 중에서도 경은이를 보면 언제 그랬냐 싶게 금새 즐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경은이 때문에 지난해는 참 즐거운 해였습니다. 이렇게 같은 세월을 살면서 삶의 어느 한 부분은 많이 힘들고 어렵고, 또 삶의 다른 부분은 너무 기쁘고 즐거운 것… 이런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지나고 나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렵고 힘 든 것을 아시고 힘이 되고 즐거워할 것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경은이는 그렇게 내가 힘이 들 때 나를 붙잡아주는 사랑의 손길이고, 내가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을 덮어주는 은혜의 햇살이었습니다.
경은이가 그렇게 내게 힘이 되고 기쁨과 즐거움이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내게 뭘 해 주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경은이가 내게 해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뭘 해주기는커녕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자기 할아버지인 나를 아직 변변하게 부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뭔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을까하는 기대는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아마 경은이는 아직도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그리고 내가 자기한테 어떤 사람인지 조차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냥 그 아이랑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집니다. 경은이와 함께 있다는, 그 것만으로도 내가 기쁘고 즐거워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경은이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생각하다가 문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냥 당신과 함께 있는 것, 그걸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이 그렇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매우 좋아하셨는데 그 이유는 당신이 지은 사람이 뭔가 당신을 위해 했기 때문이 아니고, 또 제대로 자기 몫을 해내는 것을 봤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신 것은 사람이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 해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지은 사람이 당신과 함께 있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셨습니다. 내게 해 준 것도 없고, 내가 바라는 것도 없지만 그저 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은이와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우리가 당신이 지으신 그 본래의 모습 그대로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이 그렇듯이 경은이도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관여하시는 과정을 거치며 세상에 태어났는데 지금도 경은이가 태어나기 전날 밤, 마음 조이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일이 또렷하게 기억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태어날 아이의 신체 부분 부분을 떠올리며 기도하는데 혹시라도 내가 간구하지 못한 부분에 이상이 생길 것 같은 마음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 몸의 모든 부분들을 할 수 있는 만큼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간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병원에 있던 집사람으로부터 “아이가 안 좋다”는 한마디의 전화를 받고부터는 아이의 생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매달려 기도했었습니다.
24시간의 진통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제왕절개수술을 하고서야 아이가 태어났는데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쁨도 컸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어렵고 힘든 산고를 겪은 내 딸에 대한 애처로움이 제 마음에 훨씬 더 크게 자리했었습니다. 그 후 딸네 집에 드나들거나, 딸아이와 함께 밥 먹기 위해 식당에 갔다 누구라도 만나게 되면, 으레 사람들은 저보고 ‘할아버지가 되더니 손녀가 그렇게 예쁘고 좋으냐, 경은이가 그렇게도 보고 싶으냐’고 했는데, 물론 새로 태어난 경은이가 예쁘고 또 그 아이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제 마음에는 경은이를 키우느라 애쓰는 내 딸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조금 더 많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 딸에 대한 저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경은이가 자랄수록, 그리고 경은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아이를 통한 기쁨과 즐거움은 갑절에 갑절을 더 해 갑니다. 이러한 경은이에 대한 마음은 저만이 아니라 집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경은이네로 직행을 하고, 컴퓨터나 전화기에 경은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저장해 놓고 수시로 보는 것은 기본이요, 아예 컴퓨터와 전화기 배경화면을 경은이 사진으로 설정해 놓고 항시 그 아이의 모습을 보는데 그게 그렇게 좋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지난해는 여러 가지로 참 많이 힘들었던 해였습니다. 그래서 목회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민할 만큼 어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 중에서도 경은이를 보면 언제 그랬냐 싶게 금새 즐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경은이 때문에 지난해는 참 즐거운 해였습니다. 이렇게 같은 세월을 살면서 삶의 어느 한 부분은 많이 힘들고 어렵고, 또 삶의 다른 부분은 너무 기쁘고 즐거운 것… 이런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지나고 나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렵고 힘 든 것을 아시고 힘이 되고 즐거워할 것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경은이는 그렇게 내가 힘이 들 때 나를 붙잡아주는 사랑의 손길이고, 내가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을 덮어주는 은혜의 햇살이었습니다.
경은이가 그렇게 내게 힘이 되고 기쁨과 즐거움이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내게 뭘 해 주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경은이가 내게 해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뭘 해주기는커녕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자기 할아버지인 나를 아직 변변하게 부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뭔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을까하는 기대는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아마 경은이는 아직도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그리고 내가 자기한테 어떤 사람인지 조차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냥 그 아이랑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집니다. 경은이와 함께 있다는, 그 것만으로도 내가 기쁘고 즐거워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경은이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생각하다가 문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냥 당신과 함께 있는 것, 그걸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이 그렇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매우 좋아하셨는데 그 이유는 당신이 지은 사람이 뭔가 당신을 위해 했기 때문이 아니고, 또 제대로 자기 몫을 해내는 것을 봤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신 것은 사람이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 해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지은 사람이 당신과 함께 있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셨습니다. 내게 해 준 것도 없고, 내가 바라는 것도 없지만 그저 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은이와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우리가 당신이 지으신 그 본래의 모습 그대로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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