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이전: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인지 될 수 있는 신비한 영적 현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거나 오관을 통하여 경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계시로 나타내 보여 주신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의 영적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말씀 그대로 알고, 마음으로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믿음 생활의 모든 열매는 믿는 사람 자신이 그 사실을 의식하든, 못 하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어진 영적 상태로부터 말미암아 맺어지는 신령한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시간 선 위에서 살펴 본다고 하면 세 정점을 말 할 수 있다. 첫째가 예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 창조 이전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택한 시점이 창조 전이라면, 그들을 택한 영적 위치가 “그리스도 안”이다.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게 되고, 그 새 생명은 그리스도와 하나된 관계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그리스도 안에”라고 하는 말은 믿는 자와 그리스도가 맺고 있는 영적 연합 관계를 묘사하는 말로 이해되어 왔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이 사실을 그림처럼 잘 보여준다. 포도나무 가지가 살아서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포도나무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 본체에서 잘리워진 가지는 생산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혹시 어떤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포도나무 열매일 수는 없다. 예수님 자신은 이 연합에 대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고 말씀 하심으로, 믿는 사람들의 생산적인 삶의 뿌리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영적 연합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생산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면, 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은 하나님이나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새로 받거나 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위하여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이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뜻하셨던 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하여 일어나 영적 은혜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믿음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은 믿어야 하는 영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정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2절 이하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영적 사건들에 대하여 말씀한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창조 이전의 “그리스도 안에”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하면,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그 전제되었던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인간 역사 위에서 완성하신 것이다.

혹자는 여기에 나오는 세례가 물 세례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문맥의 흐름을 보면 성령 세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은 골로새서에 나오는 말씀과 비교하여 보면 그 의미가 확실해 진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 세례를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르면서, 이 세례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고 말씀한다 (2장 11절~15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을 때, 자신도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죽은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함께 연합하여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살아난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영적 역학 관계는 오관으로 체험 할 수 없다. 단순히 믿을 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죽음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고 말 할찌라도 누가 그 육체의 고통을 “나도 함께 경험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부활의 그 심오한 하나님의 능력의 신비를 “나도 함께 경험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정점이 바로 한 사람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로 말미암아그 연합을 의식하는 순간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이 신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처음부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 진리는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믿는 자들에게 천천히 다가 오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도리를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믿음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 속에서 진리를 찾다 보면 그 많은 계시의 내용 속에서 마침내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영적 연합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때, 그 순간, 성령께서 그 진리의 영적 연합의 신비를 주관적으로 그 사람이 의식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 때, 그 순간, 그 사람은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성숙한 사람이 된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동행이나 임재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여 왔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깨닫게 된다. 자기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붙잡고 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은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에서처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더 정확히 표현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처음부터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설계 되어져 있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의 존재와 삶에 관여하기로 하신 것은, 먼 훗날,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때 부터가 아니라, 이미 사람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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