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도되는 우리나라 신문이나 방송의 톱뉴스는 다름 아닌 북한의 연평도 피격과 연관된 기사들입니다. 대개 언론에서 다루는 사건들을 보면 아무리 큰 사고나 사건이라도 한 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보도가 사라지는데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은 발생한지가 이미 두 주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문의 머리기사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빚어진 파급과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일들을 경험할 적마다 북한에 대한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늘 의견이 분분합니다. 받은 대로 갚아주어야 한다… 이제는 그만 참고 보복을 해야 한다…. 아예 이번 기회에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혼을 내야 한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그래도 용서해야한다… 이렇게 북한에 대응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사뭇 다르고, 이렇게 다른 마음들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국민들의 의견을 서로 갈리게 하는 것이 바로 북한이 바라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그런 지적도 수긍이 갑니다.
휴전이기는 하지만 대적하고 있는 상대를 주적(主敵)으로 표기하는 매우 상식적인 의견에도 일치하지 못하고, 적의 공격에 대해서는 이에 맞서 대항해야 한다는 전쟁의 기본 규칙을 알면서도 그렇게 맞서는 것을 꺼려하고, 더구나 불의한 방법으로 기습을 하는 적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잘 알면서도 쉽사리 그리 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그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북한이 우리가 대적하는 주적이면서 동시에 그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가늠하는 정의의 잣대를 가지고 북한을 보면 그들의 소행은 불의한 것이기에 그들은 분명 정의의 이름으로 의를 위한 마땅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의를 행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데 우리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행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을 알고, 또 그런 불의에 대해 묵인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을 알지만, 그렇게 불의를 행하는 그들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 형제와 자매이기에 우리는 주저하는 것 입니다.
정의와 사랑…….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으로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택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도 택하고 저것도 버려서는 안 되는 양자포용의 문제이기에 정의가 있는 사랑, 사랑이 있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사랑과 정의, 이 두 명제가 서로 맞닿아 빚어지는 갈등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망설이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가늠하는 의를 잣대삼아 정의를 택하면 그만큼 사랑은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택하면 그만큼 정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게 우리의 딜레마이고, 이와 같은 딜레마로 인해 정의와 사랑사이에서 무엇을 택하여야 할지 주저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쉽게 결단하지 못합니다.
이런 북한으로 인한 일련의 갈등을 경험하며 정의와 사랑 사이에서 어찌해야할지 머뭇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구약 사무엘상에 나오는 요나단이란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왕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왕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과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아버지 사울이 자기 친구인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편을 들자니 그렇게 되면 친구가 죽고, 친구의 편을 들자니 아버지를 배반해야 합니다. 물론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옳지 못하고, 친구인 다윗이 옳은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놓고 선택을 하자면 요나단은 주저 없이 다윗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바로 그이가 다름 아닌 바로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그렇다고 요나단이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택하면 정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요나단의 딜레마입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가면 요나단은 친구인 다윗의 정의를 위해 아버지가 그를 죽이려는 계획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은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남아 훗날 그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서 죽습니다. 요나단은 정의와 사랑 중에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정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하지도, 또는 사랑을 택하고 정의를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는 친구 다윗의 옮음, 정의를 살리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죽습니다. 의를 살리고 사랑으로 죽은 요나단의 삶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북한,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의와 사랑 중에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하느냐로 고민하는 이때, 그래서 의를 살리기 위해 사랑으로 죽는 이가 그리운 이때, 요나단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요나단의 이야기에 감동은 하면서도 여전히 그리 살지 못하는 나를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살리고 사랑으로 죽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일들을 경험할 적마다 북한에 대한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늘 의견이 분분합니다. 받은 대로 갚아주어야 한다… 이제는 그만 참고 보복을 해야 한다…. 아예 이번 기회에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혼을 내야 한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그래도 용서해야한다… 이렇게 북한에 대응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사뭇 다르고, 이렇게 다른 마음들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국민들의 의견을 서로 갈리게 하는 것이 바로 북한이 바라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그런 지적도 수긍이 갑니다.
휴전이기는 하지만 대적하고 있는 상대를 주적(主敵)으로 표기하는 매우 상식적인 의견에도 일치하지 못하고, 적의 공격에 대해서는 이에 맞서 대항해야 한다는 전쟁의 기본 규칙을 알면서도 그렇게 맞서는 것을 꺼려하고, 더구나 불의한 방법으로 기습을 하는 적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잘 알면서도 쉽사리 그리 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그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북한이 우리가 대적하는 주적이면서 동시에 그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가늠하는 정의의 잣대를 가지고 북한을 보면 그들의 소행은 불의한 것이기에 그들은 분명 정의의 이름으로 의를 위한 마땅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의를 행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데 우리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행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을 알고, 또 그런 불의에 대해 묵인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을 알지만, 그렇게 불의를 행하는 그들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 형제와 자매이기에 우리는 주저하는 것 입니다.
정의와 사랑…….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으로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택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도 택하고 저것도 버려서는 안 되는 양자포용의 문제이기에 정의가 있는 사랑, 사랑이 있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사랑과 정의, 이 두 명제가 서로 맞닿아 빚어지는 갈등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망설이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가늠하는 의를 잣대삼아 정의를 택하면 그만큼 사랑은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택하면 그만큼 정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게 우리의 딜레마이고, 이와 같은 딜레마로 인해 정의와 사랑사이에서 무엇을 택하여야 할지 주저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쉽게 결단하지 못합니다.
이런 북한으로 인한 일련의 갈등을 경험하며 정의와 사랑 사이에서 어찌해야할지 머뭇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구약 사무엘상에 나오는 요나단이란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왕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왕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과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아버지 사울이 자기 친구인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편을 들자니 그렇게 되면 친구가 죽고, 친구의 편을 들자니 아버지를 배반해야 합니다. 물론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옳지 못하고, 친구인 다윗이 옳은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놓고 선택을 하자면 요나단은 주저 없이 다윗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바로 그이가 다름 아닌 바로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그렇다고 요나단이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택하면 정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요나단의 딜레마입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가면 요나단은 친구인 다윗의 정의를 위해 아버지가 그를 죽이려는 계획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은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남아 훗날 그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서 죽습니다. 요나단은 정의와 사랑 중에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정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하지도, 또는 사랑을 택하고 정의를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는 친구 다윗의 옮음, 정의를 살리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죽습니다. 의를 살리고 사랑으로 죽은 요나단의 삶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북한,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의와 사랑 중에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하느냐로 고민하는 이때, 그래서 의를 살리기 위해 사랑으로 죽는 이가 그리운 이때, 요나단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요나단의 이야기에 감동은 하면서도 여전히 그리 살지 못하는 나를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살리고 사랑으로 죽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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