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안티기독교 운동하는 이들이 ‘개나 소나 다 목사된다’고 비아냥하는 것에 대하여 무시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사례들이 사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격미달자만을 두고 말함이 아니다, 넘치는 자격을 갖추고 목회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이들도 예외가 없다.

즈음에 자주 생각하는 것은 목사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불가사의 함이다. 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은지 30년이 지났다. 흔히들 성역 30년이라는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렀다. 한국교회 목회 10년, 이민 교회목회 20년에 속절없이 나이는 환갑을 넘기고 이제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량기질이 농후해 놀기 좋아하던 내 주위는 시를 쓰는 이, 미술하는 이, 노래하는 이들로 에워쌓여 있었다. 그런 내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참으로 목사 되는 것은 타의 반, 자의 반이다. 이때 타의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와 결국 자의가 되는 타의이다.

그렇기에 목사 되는 것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는 "방법"만을 말하기에는 목사라고 불리는 소위 "직업"이 일반적인 "직업"과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회개했는가? 목사로서 소양이 있는가? 합당한 교육을 받았는가? 목사되는 도제의 길을 걸었는가? 하는 조건도 이 타의가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그 타의를 신적 소명(召命)이라 부른다. 이 소명은 사명(使命)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소명은 목사됨에 있어 제 일조이다. 부르심을 받지 않는 목사됨은 그 개인과 공동체에 불행을 자초할 뿐이다.

시인 천양희는 시인이 되는 길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같이/ 1kg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 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사가 되는 길이다. 왜냐하면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신부가 서품될때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 항복례를 하는 것처럼 나를 죽임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목사가 되고, 목사로 살고, 목사로 죽을 때 까지 신적 소명에 대한 응답으로 그 매일 매일이 항복함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내게 은퇴를 향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마음속에 관을 만들고 시시때때로 들어가 항복례를 하므로 그 영광스런 목사 은퇴 골인 지점을 무사 통과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