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고난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만 그 고난을 우리가 직접 당하게 될 때야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것인 줄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또한 고난을 경험해 보았다고 말 할 것입니다만 그 고난의 정도는 모두 같다고 말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예고도 없이 들이 닥쳐와 삶의 안정과 쌓아 올린 요새를 몽땅 파괴당하고 잃어버리게 되면 당황하고 흔들리게 되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감당해 낼 수 없는 고난이 연속으로 닥쳐와 숨 돌릴 여유도 없고 또 소생시킬 소망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 심정이 어떨까를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나에게 이런 엄청난 고난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라며 그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알고자 당황하는 마음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모범으로 하나님에게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충실한 사람에게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지켜보는 사람들까지도 그 이유를 밝혀 보려고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게도 되는 것입니다.

저도 물론 그런 고난을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만 제 주위에도 그런 분들은 허다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굳건히 이겨나가는 분 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감동을 받고 또 존경을 하게 되는 줄 압니다. 제가 존경하는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6.25때 공산당에게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갓난 아들을 안고 이남으로 피난을 나왔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견뎌내기 힘든 고역이었습니다만 피난길에서 폭탄을 맞아 거처하는 집에 불 이 난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아들을 이불에 둘둘 말아서 구사일생으로 그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만 자신의 얼굴과 몸은 불에 타서 아주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습니다. 권사님은 그래도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 드리고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그 아들은 너무도 착하고 아름답고 또 학교에서 으뜸으로 인정받으며 잘 자라주었고 권사님은 아들 딸 때문에 늘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아들이 15 세 되었을 때 몸을 다쳐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웃들은 모두 그녀를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도 또 눈물도 지었습니다만 그녀는 깊은 신앙심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15 년 동안 아들을 내 품에 허락해 주셔서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젠 그 좋은 천국의 그 크신 하나님 품으로 데려가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녀는 그 후에도 늘 찬양을 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런 권사님께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고 신앙인의 모습을 배울 수 가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의 괴로움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만 그녀의 신앙은 인생의 괴로움을 디디고 일어서서 신앙의 승리 속에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조금 후 에는 아들을 만나볼 텐데요 뭘" 하면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슬픔이나 고난이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일일지라도 잠시 후면 세상을 이별하고 영원한 나라에 갈 것이란 확신 속에 살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소망 속에 사신 것입니다.

오늘 욥기서는 통해서 우리는 욥이 당한 극심한 고난을 보게 됩니다. 모든 소유를 순식간에 잃고 또 악창이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괴롭혀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던 욥의 참상을 우리는 떠올려 보게 됩니다. 아내마저 그의 신앙을 흔들어대며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충동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욥의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켰고 우리 모두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어 주었습니다.

욥 자신도 그 고난의 이유나 의미를 놓고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에게 극심한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처사가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혜가 자기의 지혜보다 높고 하나님의 뜻 이 자기의 뜻 보다 중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의 능력보다 크고 하나님의 판단이 자신의 판단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또 그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다스리실 주권을 가시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극진하신 사랑과 정의와 자비로 피조물들을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 이 사람 눈 에 선하게 보이든 악하게 보이든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뢰하며 받아드린 것입니다. 자신은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구더기와 같은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25:6) 고난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극심한 고난을 무엇 때문에 자기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 허락하셨는지도 알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 가지 분명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사화복의 주인이시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고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축복도 재앙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욥을 바라보면서 우리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혹시 축복을 누릴 때만 좋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며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는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는지요? 어떤 지도자는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난이 견디기 힘들 때는 하나님을 마음껏 원망하고 욕하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서 화를 내지 않으시고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사랑이 동기가 된 그분의 주권을 신뢰한다면 우리도 욥과 같은 신앙으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받아 드린다면 세상에 어떠한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 사랑을 신뢰하며 견디고 이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연약하고 미련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지혜로 충만케 해 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높으신 뜻 을 헤아릴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크고 넓고 높으신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뜻 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해 굳건한 믿음을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함께 해 주시는 우리의 '주' 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승리는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꼭 믿고 그분의 옷자락을 붙들고 세상에서 승리의 걸음을 걸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