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로운 신학 용어가운데 라프로쉬맨트(rapprochement) 사상이 있다. 이 말은 1970년대부터 유행한 것인데 상호 눈감아 주며, 누가 어떤 잘못을 해도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다. 나의 진리란 반드시 상대방의 진리가 아니므로 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 안 된다는 철학인데 이런 철학이 기독교계에 여과없이 침투해서 성경의 진리를 훼파하고 있다.

이처럼 진리를 배도하는 행위가 오늘날처럼 성행하던 시절은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 일찍이 찾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초대교회에 배도가 있었지만 사도들과 속사도, 그리고 교부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레네이우스(Irenaeus)나 터툴리안(Tertullian) 같은 분들이 얼마나 초대교회에 침투한 배도(背道)와 싸웠는가는 교회사가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근자에 종말에 관한 문제는 특히 라프로쉬맨트(rapprochement)가 심각 할 수준으로 적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시중에는 미래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다. 특히나 우주적인 종말에 관해서는 낙관 할 수 없는 비관적 징후들이 너무도 많이 나타나, 성경의 증거들이 하나씩 입증되고 있는 터이다. 우주의 환경이 이제는 낡고 낡아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가운데로 치달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생태학적 사멸론을 부르짖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자원의 고갈이 심화가 그예이다. 텅크스텐 같은 중금속은 이미 다 파먹고 없다.

숙부(叔父)가 대한 중석의 달성광산 소장으로 있었던 까닭에 그 규모의 엄청남을 기억한다. 이제는 문을 닫고 폐광이 된지 오래다.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제는 더 이상 개발할 만한 유전이 별로 없으며 미국도 경제성이 없는 유전을 어쩔 수 없이 판다고 해도 앞으로 백년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란다. 이렇게 볼 때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오늘날은 가장된 평안으로 가득 찬 시대이다.

말세지 말에 살고 있으면서도 물질의 풍요로 말미암아 종말이 문턱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부러 잊고 살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종말을 사는 진정한 태도는 오직 깨어 근신하여야 하는 일이다. 근신(謹愼)은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을 말한다. 정신을 바짝차려야 한다는 말이다. 종말이 가까옴을 알리는 징조들이 21세기에 들어 가속화되는 양상이다. 물론 그 시기와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자(賢者)들이라면 라프로쉬맨트(rapprochement)에 휘둘리지 않고 종말의 징조를 더욱 예민하게 감지하고 근신하면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