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이토록 그를 그립게 했던 걸까. 왜 사람들은 멀리서만 봤던,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이를 두고 눈물을 흘리는지……. 지난 5일간 기자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고인과의 개인적 만남이 없었거나, 있어도 극히 몇 번에 불과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고인을 일컬어 ‘우리 목사님’이라고 했다. 사랑을 표현할 때 한국인들이 자주 쓰는 ‘우리’라는 단어 말이다. 눈물도 흘렸다. 죽은 사람에 대한 일시적 연민이라고 하기에는 그 울림이 너무나 컸다.
고인의 일생을 수식하는 말은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많았던 것이 바로 ‘설교’라는 말이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는 “완벽한 설교가 아니면 그 설교를 들고 강단에 오르지 않으려 하셨다. 설교가 자신이 정한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자책하시며 고통스럽게 자신을 탓하셨다”고 했고 그의 후임인 오정현 목사는 “말씀사역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다. 말씀을 준비하시는 걸 곁에서 지켜봤다. 그야말로 말씀사역에 올인하셨다”고 했다.
성도들의 증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의교회 한 권사는 “그 분으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다. 주일설교를 들으면 그 목소리가 일주일 내내 가슴에 메아리 쳤다. 온몸의 진액을 쏟아내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했다. 평소 책과 설교를 통해 고인을 만나며 그를 존경해왔다는 서울광염교회(담임 조현삼 목사) 장세진 강도사도 “그 분의 설교를 들으며 목회자로서 내 길을 더욱 바로잡을 수 있었다. 내 삶에 예수라는 큰 글자를 새겨놓으신 분이 바로 옥 목사님이셨다”고 고백했다.
이렇듯 고인은 설교를 목회의 가장 앞에 두었던 것 같다. 설교에 들어갈 시구를 위해 몇 개의 서점을 뒤져 자신이 원하는 시집을 끝내 손에 넣고야 말았다는 김영순 사모의 간증, 완벽한 설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정된 집회마저 취소할 정도였다는 이동원 목사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 한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 할 만큼 그 모든 영역에서 말을 전하고 그것을 듣는 행위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큰 책임과 사역으로 꼽히는 것 역시 설교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동시에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 소망을 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설교자 자신의 뜻이요 사랑과 믿음, 소망이기도 하다. 고인은 자신을 비워 그 안에 하나님을 담았던 것일까. 그가 설교에 모든 걸 쏟아 부었던 건, 고통스러울 만큼 설교에 천착했던 건, 그를 통해 하나님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또 하나, 고인은 강단 위만이 아닌 아래서도 성도들을 만났다. 6일 하관예배 후 기자는 우연히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탄 서울행 차에 동승했다. 그들 모두 고인과의 개인적 만남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목사님은 참 다정했다”고 말했다.
교인 수만을 거느린 대형교회의 목회자, 저 높은 강단에서 열을 토하는 대설교가……. 그러나 그들이 기억하는 고인은 성도들의 제자훈련 현장에 찾아와 “나도 저 자리에서 훈련받곤 했는데……, 그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라고 웃었던 사람, 순장들이 그에게 “말씀이 참 쉽고 재밌어요”라고 하면 “말씀이 쉬워서 좋겠다. 나는 매주 말씀 전하는 게 제일 힘든데……”라며 농을 던지던 사람, “기도로 자녀들 다 키웠다”는 한 집사의 말에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셨나. 기도해도 안 되는 게 있던데……”라고 한없이 솔직했던 사람이었다. 강단에서 내려온 고인은 더 이상 권위의 목사가 아닌 스스럼없는 사람……, 성도들 말대로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강단 위에선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락지 않았던 완벽주의 설교가였고 그 아래에선 한 없이 부드럽고 친근했던 ‘한 사람’ 故 옥한흠 목사. 그가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외치며 작은 자들에게 성경을 돌려줬던 그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옥성호 씨의 말처럼,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정신은 만인의 가슴에 살아 다시금 이 땅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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