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위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일곱번째 인터뷰는 게렛신학교에서 예배학으로 Ph.D. 과정 중인 문영범 목사다. 그는 서울대에서 수학교육학을 전공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해 M.Div.를 마친 후, 예배설교학으로 Th.M. 학위를 받았다. 신앙과 신학의 모든 분야가 담겨야 하는 학문이야말로 예배학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연구가 미진한 예배학 분야를 보다 더 심층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미국 역시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 가운데에는 이 분야에 전문성이 가진 학교가 드물어 감리교 계통 학교인 보스톤대학교로 유학을 와 예배학으로 S.T.M.을 마치고 현재 게렛신학교에서 같은 전공으로 Ph.D. 과정 중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레익뷰교회에서 초등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 예배학의 현실은 어떤가요? 예배학이 무엇을 연구하는 분야인가요?
제가 유학을 결심한 데에는 국내에서 공부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학교에서 예배학을 배우기는 하지만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단은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강조되면서 예배학은 설교학과 함께 배우는 수준이지 전문적이며 독립적으로 발전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공 교수님들도 설교학을 전공하시면서 예배학을 가르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학문이 상호보완적이면 좋겠지만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저로 하여금 신앙인으로서 늘 긴장감을 갖게 하며 목회자로서 신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응축시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오랜 숙고 가운데 저는 ‘예배’가 바로 그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배라는 공동의 행위 속에 신학의 모든 분야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설교와 기도 그리고 예배시 찬송을 선곡하는 데 설교자와 기도자 그리고 찬양인도자의 신앙과 신학이 반영이 됩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는 목회자의 경우 하나님과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것이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예배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예배학은 크게 예배의 역사, 예배의 신학, 예배의 실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학은 “신학교에서 목회 현장에 나가 예배자인 동시에 예배 인도자인 목사후보생들을 돕는 작업”이고 일선 목회 현장에 있는 목회자 입장에서 본다면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를 올바로 세울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예배학의 현주소가 긍정적이지 않다면 그만큼 예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는 물론이고 일반 성도들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교단, 교회 혹은 개인에 따라 예배 행위를 비롯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배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그 핵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결국 예배에는 예배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모든 삶이 포함됩니다. 예배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과 교회 밖으로 파송되어 이웃과 다른 피조물을 돌보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선교학에서 말하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개념과 같은 맥락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성도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며 예배를 통해 전해진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세상으로 파송한다는 의미의 라틴어가 오늘날 가톨릭에서 예배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미사의 기원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강조한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가 오늘날 약화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예배와 삶의 관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요?
저는 한국교회의 장례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려고 하는데 장례는 인간이 일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로병사라고 지칭하는 삶의 단계마다 교회는 돌 잔치, 결혼, 장례와 같은 목회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재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 현장에서는 목회 예식의 대상이 되는 갓난 아기, 결혼하는 두 사람, 혹은 고인과 그 유족만을 염두에 두고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각각의 목회 예식을 집례하면서 목회자가 예식의 주요 대상이 되는 이들과 참석한 모든 회중들에게 “한 인간의 인생 전체의 과정 동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도록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통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도 결국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주일 예배에서는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목회 예식에서는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주일 예배와 목회 예식을 대비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그곳이 교회 안이건 교회 밖이건 상관없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와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점점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예배도 경험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특히 예배학적으로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구도자 집회(Seeker’s worship)가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에 소개된 경우를 들 수 있겠는데요.
90년대 초반, 한국에 구도자 집회가 도입될 때, 예배학자들은 예배란 신앙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비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한 이 모임은 예배가 아닌 “집회”로 부르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다고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목회자들이 “열린 집회”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 없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다양한 컨퍼런스와 출간된 책으로 인한 열풍에 휩쓸려 무분별하게 도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열린 집회”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수많은 목회자들이 최근에는 교회 성장에 도움될 것이라 예상되는 “이머징 워십(Emerging Worship)”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아닌 교회 성장의 도구로 전락한 것과 예배신학의 부재로 인해 초래되는 일선 목회자들의 “최신 프로그램 따라 잡기”라는 목회적인 방황도 큰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구도자 예배와 이머징 워십을 시작한 교회들은 그러한 형태의 예배를 도입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동기가 있었습니다. 회중들의 영적인 필요와 주변 선교대상들에 대한 깊은 고민 가운데 자신들의 교회에 맞는 예배 형태를 개발한 것입니다. 이런 제반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뜨는 프로그램’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한다면 교회적으로 큰 문제가 야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구도자 집회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가 얼마 전 자신들의 예배와 목회 활동에 대한 평가서를 내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내는데 실패했다는 보고를 한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예배신학이 정립돼 있지 않다는 것은 신학교와 목회현장의 거리가 그만큼 멀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참 조심스런 이야기이지만 신학교에서 예배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목사후보생들에게 예배학을 필수과목으로 배우도록 하는 신학교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쁜 목회 현장 속에서 목회자들이 따로 시간을 내어 예배학을 공부하거나 예배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해 볼 여유나 기회가 없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설령 목회자가 예배한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도움을 구하고자 해도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나 목회자 재교육과정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신학교는 목사후보생들과 일선 목회자들에게 예배를 올바로 준비하고 인도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교육을 제공해야 하고 목회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예배신학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신학자들은 목회 현장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신학을 전개하는 동시에 교회가 추구해야 할 예배의 미래를 제시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일선 목회자들은 당장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급급해서 유행하고 있는 예배 형태를 진지한 신학적 성찰 없이 도입하는 것에 대해 재고해야 합니다. 결국 학계와 교계의 상호 대화 없이는 바람직한 예배의 실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목회자의 심장을 가진 학자와 학자의 지성을 겸비한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예배에 대해 성도들이 문제제기를 할 때면 많은 교회들이 예배 순서를 바꾸거나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도입하곤 합니다. 그런데 겉모양을 바꾼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 교회 현실에 맞지 않는 예배 형태는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목사님들의 관심이 교회 성장에 있는데, 성장하는 교회들이 모두 동일한 예배 형식을 채택하고 있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형식 속에 깊이 있는 영성을 담아 교회 현실에 맞는 온전한 예배를 드림으로써 제자의 수가 늘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어루만지시고 은혜와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는 교회 성장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배 형태를 바꿈으로써 성도들을 많이 모으겠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들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행위입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실제 예배의 준비와 진행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6세기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배의 모습을 근거로 자신들의 언어와 활용 가능한 모든 것을 사용해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했습니다. 이 당시 각 나라와 민족이 드렸던 예배의 형태는 각기 달랐습니다. 적어도 6-7개의 예배 형태가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활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각 순서마다 신앙을 담기 위해 깊이 기도하며 실행하고 다시 고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한 고민과 신학적인 순서나 예배 형식만을 바꾸는 것은 변화를 위한 변화이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변화는 아닙니다.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사람입니다.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 목사님은 어떤 예배가 한국교회 문화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성경적인 예배형태는 단 한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그런 생각을 품고 유학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1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초대교회에서 드려진 예배의 모습을 공부하면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각 나라와 민족에게 주신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활용하셔서 다양한 예배 형태가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물론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교회들이기에 다양성 속에 일치하는 예배의 핵심이 존재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세례와 성찬을 통해 한 몸임을 확인하고 세상으로 파송되는 기본 흐름이 모든 교회의 예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예전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어떤 순서가 어디에 들어가야 하고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한국교회 혹은 이민 교회에 맞는 예배 형태란 각 교회가 스스로의 문화와 전통, 신앙과 신학에 따라 계발해야 하는 과제로 남습니다. 한인교회라 하더라도 교회가 있는 지역과 상황, 교회의 역사와 성도의 신앙유형과 성향 등에 따라 다양한 예배의 모습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성례전을 통해 얻고 그리스도의 한 몸된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예배 안에 담겨야 합니다.
-현대의 성도들의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삶이 달라지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배의 모습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있었다고 보십니까?
물론 초대교회가 완벽한 교회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삶이 일치하도록 가르치고 실천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한 예로, 초대교회 중 한 곳에서는 2-3년간의 세례교육기간 동안 세례후보자에게 교리교육은 물론 신앙인의 삶의 실제를 가르치고 실천하게 했습니다. 대부모제도(God parents)를 두어 세례 후보자가 교육 받은 대로 살아가도록 지도하고 후원하게 했습니다. 세례 준비기간이 끝나면 인터뷰를 통해 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점검을 했습니다. 이 때 대부모가 세례후보자의 삶을 증언하게 되고 통과하게 되면 세례를 받습니다. 하지만 세례자의 삶의 점검은 세례식이 거행되는 자리에서도 계속됩니다. 집례자가 회중들을 향해 세례후보자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산 것이 있는지, 세례를 주는 것에 동의하는 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회중들이 새롭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형제와 자매를 신앙공동체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약을 하게 했습니다. 초대교인들에게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첫 출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매 번 세례식이 있을 때마다 집례자는 세례 후 종려나무에 세례수를 묻혀 회중에게 뿌리며 “당신이 세례 받을 때에 주님 앞에 서약한 것을 기억하십시오”하며 세례교인들이 자신의 세례 언약을 갱신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교리 교육에 치중하는 현대교회와는 달리 세례후보자와 세례 교인 모두에게 교회 안과 밖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일치된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실천했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공동체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잘 드려진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 자신의 예배 철학 혹은 예배 신학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예배 드리는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일 성수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인데 그 핵심은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예배가 의무감에서만 드려진다면 때때로 감격이 없는 짐스러운 숙제로 예배가 전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인 우리들에게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부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사람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다른 사람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드신 그분의 걸작품입니다.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걸작품을 내가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향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제사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다툰 것이 생각난다면 먼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예배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의 심성 가운데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우리 문화 (We Culture)”를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연 만물을 사랑하는 심성도 주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전통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파송 전 경험했던 부흥회 형식의 신학적 성찰이 결여된 서구식의 예배 형태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이미 미국교회에서도 신학적인 성찰을 통해 서부 개척시대 상황에 맞게 드려졌던 천막집회의 형식의 예배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예배 형식으로 고착되어 숭배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한국적인 정서와 문화에 맞는 예배의 형태를 기독교 예전 전통과 신학적인 바탕 위에서 세워나갈 때 우리에게 맞는 잘 드려진 예배가 개발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민 교회는 이민 교회의 상황, 문화, 역사, 전통, 그리고 현실이 반영된 예배를 드릴 때에 잘 드린 예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배를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있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예배의 현장 가운데 성령님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 담긴,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사용하시는 예배가 잘 드려진 예배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예배 문화가 약화된 것에는 설교 중심의 예배 문화가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성도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는 보수적인 관점 때문이 아닐까요?
원칙적으로는 그 관점에 저도 동의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들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실제로 그러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흔히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경험되는 말씀”인 성례전. 우리는 말씀을 중요시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성경말씀 자체를 예배 가운데서 무시합니다. 실례로 성경봉독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시간인데 우리는 설교를 듣기 위한 요식행위로 생각합니다. 선포된 말씀이 설교자와 회중들에 의해서 무시되기도 합니다. 봉독한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본문의 의미를 무시한 채 설교자 자신의 화술과 지식으로 포장해서 전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 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해 버리기도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경험되는 말씀인 성례전의 경우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 버리고 일년에 단 몇 번 거행되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와 성찬에 담긴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우리는 세 가지 형태의 말씀이 예배 가운데 균형 있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한인교회의 문제로 넘어 와서 다수의 한인교회가 1세와 2세가 분리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까요?
1세들은 전통적 방식의 예배를, 2세들은 미국교회의 세팅에서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통적이란 말은 초대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드려진 방식의 예배를 말합니다. 보통 초대교회의 전통에 입각한 예배는 예전(Liturgy)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1세와 2세가 함께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가 갖고 있는 언어, 문화, 신앙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품지 못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주일예배라는 한정된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1세와 1.5세 혹은 2세가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려면 그 이전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자리가 예배 밖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공간에서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 신앙 색채를 담은 예배를 드리던 2세들이 자연스럽게 1세들의 예배 문화로 유입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10여 년이 넘게 1세와는 다름을 교육받은 2세들이 자신들의 몸 속에 기억되어 있는 예배 문화를 버리고 1세의 예배 문화를 수용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인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교회를 비롯한 많은 세계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한 예배학자는 “예배 전쟁” (Worship War)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어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한 몸인 것을 강조하신 것처럼 1세와 2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 더불어 예배를 드리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서로 마음을 열어놓고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장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이나 한인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있어서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요?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는 열심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만큼 삶 가운데서 예배를 중요시 하는 민족도 없습니다. 이른 새벽 기도회로 아침을 열고 늦은 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부르짖는 예배자의 삶이 오늘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를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신앙유산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신입니다.
-네. 목사님. 끝으로 예배를 고민하는 이민교회 목회자들에게 한가지 고민할 주제를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이민목회 현장에 맞는 예배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민의 현장에 있는 성도들은 삶의 현실과 고민 그리고 필요를 찾은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가도록 돕는 동반자요 인도자로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와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는 것은 굳이 예배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목사님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목사님들이 성도들과 예배에 대해 열린 대화를 해 보시기를 제안합니다. 성도들이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움과 문제가 무엇이며 그들이 예배를 통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다음으로, 예배 교육을 제안합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과 함께 예배가 무엇이며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를 활용해 보십시오. 설교 본문을 선정하는 데 쏟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전체 예배를 예수님의 생애 주기를 따라 통일된 주제로 준비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끝으로, 예배 인도자와 찬양대 지휘자, 기도자 등으로 구성된 예배 위원회를 활용해 보십시오. 예배의 준비부터 진행,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일곱번째 인터뷰는 게렛신학교에서 예배학으로 Ph.D. 과정 중인 문영범 목사다. 그는 서울대에서 수학교육학을 전공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해 M.Div.를 마친 후, 예배설교학으로 Th.M. 학위를 받았다. 신앙과 신학의 모든 분야가 담겨야 하는 학문이야말로 예배학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연구가 미진한 예배학 분야를 보다 더 심층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미국 역시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 가운데에는 이 분야에 전문성이 가진 학교가 드물어 감리교 계통 학교인 보스톤대학교로 유학을 와 예배학으로 S.T.M.을 마치고 현재 게렛신학교에서 같은 전공으로 Ph.D. 과정 중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레익뷰교회에서 초등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 예배학의 현실은 어떤가요? 예배학이 무엇을 연구하는 분야인가요?
제가 유학을 결심한 데에는 국내에서 공부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학교에서 예배학을 배우기는 하지만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단은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강조되면서 예배학은 설교학과 함께 배우는 수준이지 전문적이며 독립적으로 발전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공 교수님들도 설교학을 전공하시면서 예배학을 가르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학문이 상호보완적이면 좋겠지만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저로 하여금 신앙인으로서 늘 긴장감을 갖게 하며 목회자로서 신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응축시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오랜 숙고 가운데 저는 ‘예배’가 바로 그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배라는 공동의 행위 속에 신학의 모든 분야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설교와 기도 그리고 예배시 찬송을 선곡하는 데 설교자와 기도자 그리고 찬양인도자의 신앙과 신학이 반영이 됩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는 목회자의 경우 하나님과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것이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예배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예배학은 크게 예배의 역사, 예배의 신학, 예배의 실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학은 “신학교에서 목회 현장에 나가 예배자인 동시에 예배 인도자인 목사후보생들을 돕는 작업”이고 일선 목회 현장에 있는 목회자 입장에서 본다면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를 올바로 세울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예배학의 현주소가 긍정적이지 않다면 그만큼 예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는 물론이고 일반 성도들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교단, 교회 혹은 개인에 따라 예배 행위를 비롯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배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그 핵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결국 예배에는 예배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모든 삶이 포함됩니다. 예배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과 교회 밖으로 파송되어 이웃과 다른 피조물을 돌보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선교학에서 말하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개념과 같은 맥락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성도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며 예배를 통해 전해진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세상으로 파송한다는 의미의 라틴어가 오늘날 가톨릭에서 예배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미사의 기원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강조한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가 오늘날 약화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예배와 삶의 관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요?
저는 한국교회의 장례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려고 하는데 장례는 인간이 일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로병사라고 지칭하는 삶의 단계마다 교회는 돌 잔치, 결혼, 장례와 같은 목회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재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 현장에서는 목회 예식의 대상이 되는 갓난 아기, 결혼하는 두 사람, 혹은 고인과 그 유족만을 염두에 두고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각각의 목회 예식을 집례하면서 목회자가 예식의 주요 대상이 되는 이들과 참석한 모든 회중들에게 “한 인간의 인생 전체의 과정 동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도록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통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도 결국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주일 예배에서는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목회 예식에서는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주일 예배와 목회 예식을 대비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그곳이 교회 안이건 교회 밖이건 상관없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와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점점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예배도 경험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특히 예배학적으로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구도자 집회(Seeker’s worship)가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에 소개된 경우를 들 수 있겠는데요.
90년대 초반, 한국에 구도자 집회가 도입될 때, 예배학자들은 예배란 신앙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비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한 이 모임은 예배가 아닌 “집회”로 부르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다고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목회자들이 “열린 집회”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 없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다양한 컨퍼런스와 출간된 책으로 인한 열풍에 휩쓸려 무분별하게 도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열린 집회”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수많은 목회자들이 최근에는 교회 성장에 도움될 것이라 예상되는 “이머징 워십(Emerging Worship)”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아닌 교회 성장의 도구로 전락한 것과 예배신학의 부재로 인해 초래되는 일선 목회자들의 “최신 프로그램 따라 잡기”라는 목회적인 방황도 큰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구도자 예배와 이머징 워십을 시작한 교회들은 그러한 형태의 예배를 도입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동기가 있었습니다. 회중들의 영적인 필요와 주변 선교대상들에 대한 깊은 고민 가운데 자신들의 교회에 맞는 예배 형태를 개발한 것입니다. 이런 제반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뜨는 프로그램’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한다면 교회적으로 큰 문제가 야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구도자 집회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가 얼마 전 자신들의 예배와 목회 활동에 대한 평가서를 내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내는데 실패했다는 보고를 한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예배신학이 정립돼 있지 않다는 것은 신학교와 목회현장의 거리가 그만큼 멀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참 조심스런 이야기이지만 신학교에서 예배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목사후보생들에게 예배학을 필수과목으로 배우도록 하는 신학교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쁜 목회 현장 속에서 목회자들이 따로 시간을 내어 예배학을 공부하거나 예배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해 볼 여유나 기회가 없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설령 목회자가 예배한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도움을 구하고자 해도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나 목회자 재교육과정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신학교는 목사후보생들과 일선 목회자들에게 예배를 올바로 준비하고 인도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교육을 제공해야 하고 목회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예배신학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신학자들은 목회 현장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신학을 전개하는 동시에 교회가 추구해야 할 예배의 미래를 제시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일선 목회자들은 당장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급급해서 유행하고 있는 예배 형태를 진지한 신학적 성찰 없이 도입하는 것에 대해 재고해야 합니다. 결국 학계와 교계의 상호 대화 없이는 바람직한 예배의 실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목회자의 심장을 가진 학자와 학자의 지성을 겸비한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예배에 대해 성도들이 문제제기를 할 때면 많은 교회들이 예배 순서를 바꾸거나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도입하곤 합니다. 그런데 겉모양을 바꾼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 교회 현실에 맞지 않는 예배 형태는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목사님들의 관심이 교회 성장에 있는데, 성장하는 교회들이 모두 동일한 예배 형식을 채택하고 있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형식 속에 깊이 있는 영성을 담아 교회 현실에 맞는 온전한 예배를 드림으로써 제자의 수가 늘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어루만지시고 은혜와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는 교회 성장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배 형태를 바꿈으로써 성도들을 많이 모으겠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들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행위입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실제 예배의 준비와 진행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6세기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배의 모습을 근거로 자신들의 언어와 활용 가능한 모든 것을 사용해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했습니다. 이 당시 각 나라와 민족이 드렸던 예배의 형태는 각기 달랐습니다. 적어도 6-7개의 예배 형태가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활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각 순서마다 신앙을 담기 위해 깊이 기도하며 실행하고 다시 고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한 고민과 신학적인 순서나 예배 형식만을 바꾸는 것은 변화를 위한 변화이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변화는 아닙니다.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사람입니다.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 목사님은 어떤 예배가 한국교회 문화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성경적인 예배형태는 단 한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그런 생각을 품고 유학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1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초대교회에서 드려진 예배의 모습을 공부하면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각 나라와 민족에게 주신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활용하셔서 다양한 예배 형태가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물론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교회들이기에 다양성 속에 일치하는 예배의 핵심이 존재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세례와 성찬을 통해 한 몸임을 확인하고 세상으로 파송되는 기본 흐름이 모든 교회의 예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예전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어떤 순서가 어디에 들어가야 하고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한국교회 혹은 이민 교회에 맞는 예배 형태란 각 교회가 스스로의 문화와 전통, 신앙과 신학에 따라 계발해야 하는 과제로 남습니다. 한인교회라 하더라도 교회가 있는 지역과 상황, 교회의 역사와 성도의 신앙유형과 성향 등에 따라 다양한 예배의 모습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성례전을 통해 얻고 그리스도의 한 몸된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예배 안에 담겨야 합니다.
-현대의 성도들의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삶이 달라지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배의 모습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있었다고 보십니까?
물론 초대교회가 완벽한 교회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삶이 일치하도록 가르치고 실천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한 예로, 초대교회 중 한 곳에서는 2-3년간의 세례교육기간 동안 세례후보자에게 교리교육은 물론 신앙인의 삶의 실제를 가르치고 실천하게 했습니다. 대부모제도(God parents)를 두어 세례 후보자가 교육 받은 대로 살아가도록 지도하고 후원하게 했습니다. 세례 준비기간이 끝나면 인터뷰를 통해 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점검을 했습니다. 이 때 대부모가 세례후보자의 삶을 증언하게 되고 통과하게 되면 세례를 받습니다. 하지만 세례자의 삶의 점검은 세례식이 거행되는 자리에서도 계속됩니다. 집례자가 회중들을 향해 세례후보자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산 것이 있는지, 세례를 주는 것에 동의하는 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회중들이 새롭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형제와 자매를 신앙공동체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약을 하게 했습니다. 초대교인들에게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첫 출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매 번 세례식이 있을 때마다 집례자는 세례 후 종려나무에 세례수를 묻혀 회중에게 뿌리며 “당신이 세례 받을 때에 주님 앞에 서약한 것을 기억하십시오”하며 세례교인들이 자신의 세례 언약을 갱신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교리 교육에 치중하는 현대교회와는 달리 세례후보자와 세례 교인 모두에게 교회 안과 밖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일치된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실천했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공동체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잘 드려진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 자신의 예배 철학 혹은 예배 신학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예배 드리는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일 성수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인데 그 핵심은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예배가 의무감에서만 드려진다면 때때로 감격이 없는 짐스러운 숙제로 예배가 전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인 우리들에게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부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사람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다른 사람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드신 그분의 걸작품입니다.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걸작품을 내가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향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제사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다툰 것이 생각난다면 먼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예배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의 심성 가운데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우리 문화 (We Culture)”를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연 만물을 사랑하는 심성도 주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전통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파송 전 경험했던 부흥회 형식의 신학적 성찰이 결여된 서구식의 예배 형태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이미 미국교회에서도 신학적인 성찰을 통해 서부 개척시대 상황에 맞게 드려졌던 천막집회의 형식의 예배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예배 형식으로 고착되어 숭배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한국적인 정서와 문화에 맞는 예배의 형태를 기독교 예전 전통과 신학적인 바탕 위에서 세워나갈 때 우리에게 맞는 잘 드려진 예배가 개발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민 교회는 이민 교회의 상황, 문화, 역사, 전통, 그리고 현실이 반영된 예배를 드릴 때에 잘 드린 예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배를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있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예배의 현장 가운데 성령님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 담긴,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사용하시는 예배가 잘 드려진 예배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예배 문화가 약화된 것에는 설교 중심의 예배 문화가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성도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는 보수적인 관점 때문이 아닐까요?
원칙적으로는 그 관점에 저도 동의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들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실제로 그러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흔히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경험되는 말씀”인 성례전. 우리는 말씀을 중요시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성경말씀 자체를 예배 가운데서 무시합니다. 실례로 성경봉독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시간인데 우리는 설교를 듣기 위한 요식행위로 생각합니다. 선포된 말씀이 설교자와 회중들에 의해서 무시되기도 합니다. 봉독한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본문의 의미를 무시한 채 설교자 자신의 화술과 지식으로 포장해서 전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 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해 버리기도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경험되는 말씀인 성례전의 경우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 버리고 일년에 단 몇 번 거행되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와 성찬에 담긴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우리는 세 가지 형태의 말씀이 예배 가운데 균형 있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한인교회의 문제로 넘어 와서 다수의 한인교회가 1세와 2세가 분리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까요?
1세들은 전통적 방식의 예배를, 2세들은 미국교회의 세팅에서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통적이란 말은 초대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드려진 방식의 예배를 말합니다. 보통 초대교회의 전통에 입각한 예배는 예전(Liturgy)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1세와 2세가 함께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가 갖고 있는 언어, 문화, 신앙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품지 못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주일예배라는 한정된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1세와 1.5세 혹은 2세가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려면 그 이전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자리가 예배 밖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공간에서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 신앙 색채를 담은 예배를 드리던 2세들이 자연스럽게 1세들의 예배 문화로 유입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10여 년이 넘게 1세와는 다름을 교육받은 2세들이 자신들의 몸 속에 기억되어 있는 예배 문화를 버리고 1세의 예배 문화를 수용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인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교회를 비롯한 많은 세계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한 예배학자는 “예배 전쟁” (Worship War)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어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한 몸인 것을 강조하신 것처럼 1세와 2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 더불어 예배를 드리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서로 마음을 열어놓고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장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이나 한인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있어서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요?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는 열심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만큼 삶 가운데서 예배를 중요시 하는 민족도 없습니다. 이른 새벽 기도회로 아침을 열고 늦은 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부르짖는 예배자의 삶이 오늘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를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신앙유산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신입니다.
-네. 목사님. 끝으로 예배를 고민하는 이민교회 목회자들에게 한가지 고민할 주제를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이민목회 현장에 맞는 예배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민의 현장에 있는 성도들은 삶의 현실과 고민 그리고 필요를 찾은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가도록 돕는 동반자요 인도자로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와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는 것은 굳이 예배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목사님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목사님들이 성도들과 예배에 대해 열린 대화를 해 보시기를 제안합니다. 성도들이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움과 문제가 무엇이며 그들이 예배를 통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다음으로, 예배 교육을 제안합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과 함께 예배가 무엇이며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를 활용해 보십시오. 설교 본문을 선정하는 데 쏟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전체 예배를 예수님의 생애 주기를 따라 통일된 주제로 준비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끝으로, 예배 인도자와 찬양대 지휘자, 기도자 등으로 구성된 예배 위원회를 활용해 보십시오. 예배의 준비부터 진행,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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