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켄지]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것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많이 읽히는 책 가운데「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 내용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악성 췌장암에 걸려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 적인 선고를 받고 면회도 금지되어 병원 독방에서 응급조치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죽음과 싸우는 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미 성인으로 의사 일을 하고 있는 아들입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자식들에게 애정 표현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자식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항상 자기주장대로 해 버리니까 아들이 나중에는 아버지만 보면 가슴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지고, 결국은 둘 사이가 멀어져서 수십 년 동안 겉으로만 부자 사이지 내적인 사랑이 오고 가는 일이 없는 삭막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와 화해가 되지 않으면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가 치유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병문안을 와서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꽉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느닷없이 자기를 껴안으니까 아버지는 잔뜩 긴장해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굳어 가지고 안기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그 다음 번 병문안 와서 다시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빳빳이 안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마음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건 정말 소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는 자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고, 아버지는 진정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문안을 갈 때마다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가 말을 잘 안 들으면 "아버지, 팔을 저에게 둘러보세요. 그리고 좀 꽉 껴안으세요. 그래요, 됐어요. 좀 더 힘 있게 껴안아 보세요."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계속 유도했습니다.
아버지의 긴장된 자세가 풀어지는 데는 그로부터 몇 달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껴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깊은 애정과 염려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2백 번째의 포옹이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널 사랑한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표현, 애정의 표시를 처음으로 들은 것입니다. [해롤드 블룸필드]라고 하는 그 아들 되는 사람이 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저를 2백 번만 안아주셨나요? 2천 번도 더 안아주셨지요. 하나님이 처음에 절 안아주실 때 제가 어떻게 했어요? 뻣뻣했지요. 안기기 싫어 고개를 마구 쳐들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2백 번이고, 2천 번이고, 지금까지 수없이 안아주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하나님, 사랑해요. 예수님 사랑해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랑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사랑해요."하고 고백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 재미가 어디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의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는 기쁨과 행복에 있는 것 아닙니까? [필립 블리스]라는 사람이 지은 찬송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단 말 참 좋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복이요 재미인 것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복음의 비밀을 다 밝히고 난 사도바울이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외치는 고백이요 찬양이며 확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섯 가지 질문형식- 수사적인 질문 -Rhetorical Question을 빌어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사랑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얼마나 가슴 벅차고 얼마나 확신이 가면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환난에서도 어떤 어려움에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탄성을 하며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이 주시는 구체적인 유익을 보면서 사도바울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첫 번째 유익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님은 = 무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 할 수 있겠습니까?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제가 살던 동네가 보문동인데 어릴 적에 동네 친구들 중에 아주 운동을 잘하는 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을 갈라서 무엇을 하든지 이기는 팀이 되려면 그 애 있는 팀에 들어가면 됩니다. 아무리 해도 우리 동네에선 그 애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 애가 골목대장이 되어서 이래라 하면하고 저래라 하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이사를 왔는데 아 정말 요새 아이들 말로 짱입니다. 한순간 그 애를 전임 골목대장으로 만듭니다. 마침 그 애랑 저랑 뭔가 잘 통해서 이젠 그 애랑 같이 있을 때에는 저는 동네에서 .거칠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가 있을까.
요일4: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크신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힘이 되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받는 유익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때 종종 우리들에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우가 없었습니까? 1995년쯤에 저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달라스에서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무작정 나갔습니다. 오라는 교회도 없었고 심지어는 교단배경도 없어서 난감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세례를 주신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신대 편입목사 과정에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다시 학교에 간다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목사가 돼서 다시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만 집에서 교회까지 버스를 두 세 번씩 타고 언덕배기를 날마다 걸어서 간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는 기분이랄까. 좌우간 그렇게 지내는데도 여전히 앞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참 마음이 힘들었는데 그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데. 다른 목사들은 이렇게 공부 안 해도 목회만 잘 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길을 인도해 주시기 않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하나님한테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6개월쯤 지났을 때 8월쯤 되었는데 제가 나온 대학교 동문 목회자 모임을 우연히 갔습니다. 거기서 회장으로 수고하시는 서울교회 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어쨌든 한국서 목회활동을 하게 되고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거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적절한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자를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신 사실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 렘31:3절에서 무궁한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빌립보서 4:19절에서는 “하나님은 너희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윌버 챔프맨(Wilbur Chapman)은 빌립보서 4장 19절을 "하나님의 백지수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내 인생의 현실에서 풍성하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나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의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살 때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자식들에게 애정 표현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자식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항상 자기주장대로 해 버리니까 아들이 나중에는 아버지만 보면 가슴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지고, 결국은 둘 사이가 멀어져서 수십 년 동안 겉으로만 부자 사이지 내적인 사랑이 오고 가는 일이 없는 삭막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와 화해가 되지 않으면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가 치유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병문안을 와서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꽉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느닷없이 자기를 껴안으니까 아버지는 잔뜩 긴장해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굳어 가지고 안기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그 다음 번 병문안 와서 다시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빳빳이 안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마음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건 정말 소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는 자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고, 아버지는 진정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문안을 갈 때마다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가 말을 잘 안 들으면 "아버지, 팔을 저에게 둘러보세요. 그리고 좀 꽉 껴안으세요. 그래요, 됐어요. 좀 더 힘 있게 껴안아 보세요."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계속 유도했습니다.
아버지의 긴장된 자세가 풀어지는 데는 그로부터 몇 달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껴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깊은 애정과 염려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2백 번째의 포옹이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널 사랑한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표현, 애정의 표시를 처음으로 들은 것입니다. [해롤드 블룸필드]라고 하는 그 아들 되는 사람이 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저를 2백 번만 안아주셨나요? 2천 번도 더 안아주셨지요. 하나님이 처음에 절 안아주실 때 제가 어떻게 했어요? 뻣뻣했지요. 안기기 싫어 고개를 마구 쳐들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2백 번이고, 2천 번이고, 지금까지 수없이 안아주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하나님, 사랑해요. 예수님 사랑해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랑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사랑해요."하고 고백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 재미가 어디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의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는 기쁨과 행복에 있는 것 아닙니까? [필립 블리스]라는 사람이 지은 찬송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단 말 참 좋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복이요 재미인 것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복음의 비밀을 다 밝히고 난 사도바울이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외치는 고백이요 찬양이며 확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섯 가지 질문형식- 수사적인 질문 -Rhetorical Question을 빌어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사랑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얼마나 가슴 벅차고 얼마나 확신이 가면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환난에서도 어떤 어려움에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탄성을 하며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이 주시는 구체적인 유익을 보면서 사도바울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첫 번째 유익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님은 = 무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 할 수 있겠습니까?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제가 살던 동네가 보문동인데 어릴 적에 동네 친구들 중에 아주 운동을 잘하는 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을 갈라서 무엇을 하든지 이기는 팀이 되려면 그 애 있는 팀에 들어가면 됩니다. 아무리 해도 우리 동네에선 그 애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 애가 골목대장이 되어서 이래라 하면하고 저래라 하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이사를 왔는데 아 정말 요새 아이들 말로 짱입니다. 한순간 그 애를 전임 골목대장으로 만듭니다. 마침 그 애랑 저랑 뭔가 잘 통해서 이젠 그 애랑 같이 있을 때에는 저는 동네에서 .거칠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가 있을까.
요일4: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크신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힘이 되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받는 유익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때 종종 우리들에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우가 없었습니까? 1995년쯤에 저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달라스에서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무작정 나갔습니다. 오라는 교회도 없었고 심지어는 교단배경도 없어서 난감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세례를 주신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신대 편입목사 과정에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다시 학교에 간다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목사가 돼서 다시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만 집에서 교회까지 버스를 두 세 번씩 타고 언덕배기를 날마다 걸어서 간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는 기분이랄까. 좌우간 그렇게 지내는데도 여전히 앞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참 마음이 힘들었는데 그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데. 다른 목사들은 이렇게 공부 안 해도 목회만 잘 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길을 인도해 주시기 않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하나님한테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6개월쯤 지났을 때 8월쯤 되었는데 제가 나온 대학교 동문 목회자 모임을 우연히 갔습니다. 거기서 회장으로 수고하시는 서울교회 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어쨌든 한국서 목회활동을 하게 되고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거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적절한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자를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신 사실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 렘31:3절에서 무궁한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빌립보서 4:19절에서는 “하나님은 너희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윌버 챔프맨(Wilbur Chapman)은 빌립보서 4장 19절을 "하나님의 백지수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내 인생의 현실에서 풍성하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나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의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살 때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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