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Vision)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십니까?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들은 이런 대답을 많이 하실 겁니다. “큰 꿈을 품고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공부 잘 하라고(정확히 표현하면 시험 점수 잘 받아오라고), 좋은 대학 가라고, 좋은 직장 얻으라고, 결혼 잘 하라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합니다. 저도 10살, 8살인 두 딸이 있는데 자녀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자녀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우리는 아이들에게 달리라고 말합니다.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 왜 달려야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조건 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다고 강조합니다. 영성지수(Spiritual Quotient), 감성지수(Emotional Quotient) 등 각각의 아이에 맞는 달란트는 전혀 인정되지 않고, 오직 점수로 그 아이에 대한 평가가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나마 커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비뚤게 나가지 않으면 다행인데, 아이들 중에는 이 비전이라는 중압감으로 인해 방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이재철 목사님이 말하는 비전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비전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까?’ 일독한 후 행복했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사울의 인생을 통해 비전을 푸는데, 먼저 ‘눈먼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당신들의 천국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좇아 열심을 다해 산 결과는 고작 성자 하나님(예수님)의 대적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역설적으로 사울의 눈을 멀게 해서 비전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에 물든 눈으로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세상 눈을 감고 주님만 보게 해 달라고…. 혼자 힘으로는 잘 되지 않으니 인도해 달라고….
두 번째로 저자는 ‘비늘 벗은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에 나오는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는 구절을 가지고 푼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울이 눈에 비늘을 뒤집어쓰고 살아온 셈이었지만, 사울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받은 시험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멋있게 뛰어내려라.” “천하만국 권세를 다 줄 테니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한 마디로 현세주의자로 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오직 세상에 보이는 것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처럼 현세에 시선이 고정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두었기에 이 유혹을 말씀으로 이깁니다. 마찬가지로 비전의 사람도 주님처럼 비늘 벗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비늘을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벗겨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을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믿으십니까? 그 분이 내 눈의 비늘을 능히 제거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나요?
세 번째로 ‘성전의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성전을 건축물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움직이는 성전(portable temple)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산 것입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은 움직이는 성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세 번째 장에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사인 내가 자신을 성전으로 일구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면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비양심의 세계에서 양심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지만, 성전 되지 못한 모습으로 목회의 현장에 나간다면 끔찍한 비극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살게 해 달라고….
네 번째 장에서는 ‘비전의 사람’이 되기 위해 유념해야 할 다섯 가지 사항을 설명합니다.
1) 현장의 중요성: 하나님의 비전은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책상이나 기도 속에서 비전을 얻은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다가 하나님의 비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2) 지닌 것의 소중함: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는, 오늘은 곧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삽니다.
3) 자기 세계의 확장: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간다고 합니다.
4) 이성적 신앙: 하나님의 비전은 이성적 신앙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결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보고픈 유혹에서 자유하는 자입니다. 크리스천은 영원을 사는 사람이기에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결과를 우리 생애에 못 볼 수도 있지만, 영원 속에서 주님과 함께 반드시 확인한다는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결론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하면서 정리하겠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에, ‘나가노 마끼’라는 젊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안수를 받은 목사님은 미신이 판을 치는 ‘가나사와’라는 곳에 텐트를 치고 개척 교회를 시작했는데, 성도가 한 명도 생기지 않아 낙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5년 동안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내와 아이, 예배 참석자는 가족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이 한 명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감격을 해서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청년이 갑자기 “욱” 하더니 핏덩이를 토했습니다. 폐병 환자였습니다. 당시 폐결핵은 고칠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님은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쫓아낼까?’ 그런데 그 순간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니야, 이 청년은 주님이 5년 만에 나에게 보내 주신 영혼인데…’ 나가노 목사님은 행주를 가져와서 청년이 토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을 차린 뒤 청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 청년은 유명한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출생이 어두웠기에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고, 청년 때 복음을 접해서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폐결핵이 발견되어 강제 휴학되었고, 교회에서도 출석을 거부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다가 ‘나가노’ 목사님의 소문을 우연히 듣고, 목사님마저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면, 세상을 버리기로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님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계속 그 청년을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청년이 폐병에서 완치되었습니다.
그 후 이 청년은 신학교에 복학해서 목사가 되었고, 수많은 빈민들을 위해 살게 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몇 끼씩 굶은 빈민들은, 장(腸)에 남아 있던 변이 차돌처럼 딱딱해져서 배변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 청년 목사님은 그런 빈민들의 항문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후벼서 뚫었습니다. 너무 심해서 손으로 안 되는 사람에게는 항문에 자기 입을 대고, 그 딱딱한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고? 그 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배운 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토해 낸 폐결핵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해 주신 사랑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분은 2차 대전 때 전쟁을 반대하다가 헌병대에 끌려갔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인 최초로 한국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고,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 살면서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를 크리스천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2차 대전이 끝날 때 무서운 학살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생을 목사와 사회 운동가로 사신 그 분의 이름은 ‘가가와 도요히코, 하천풍언’ 목사님입니다.
나가노 목사님의 핏덩이를 닦아주는 사랑이 없었다면, 하천풍언 목사님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하천풍언 목사님의 빈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2차 대전 후 일본인들은 중국인에 의해서 비참하게 학살을 당했을 겁니다. 나가노 목사님은 세상의 논리로 보면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5년 동안 한 명을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사랑과 하나님의 비전은 어두웠던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세상의 논리로는 부족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네 속에 있는 비전(Vision)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다.” 이러한 인정을 받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누가 뭐라고 평가해도, 하나님만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이 훈 목사.
이훈 목사(분당 만나교회 부목사) lhlja@hanmail.net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자녀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우리는 아이들에게 달리라고 말합니다.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 왜 달려야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조건 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다고 강조합니다. 영성지수(Spiritual Quotient), 감성지수(Emotional Quotient) 등 각각의 아이에 맞는 달란트는 전혀 인정되지 않고, 오직 점수로 그 아이에 대한 평가가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나마 커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비뚤게 나가지 않으면 다행인데, 아이들 중에는 이 비전이라는 중압감으로 인해 방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이재철 목사님이 말하는 비전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비전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까?’ 일독한 후 행복했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사울의 인생을 통해 비전을 푸는데, 먼저 ‘눈먼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당신들의 천국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좇아 열심을 다해 산 결과는 고작 성자 하나님(예수님)의 대적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역설적으로 사울의 눈을 멀게 해서 비전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에 물든 눈으로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세상 눈을 감고 주님만 보게 해 달라고…. 혼자 힘으로는 잘 되지 않으니 인도해 달라고….
두 번째로 저자는 ‘비늘 벗은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에 나오는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는 구절을 가지고 푼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울이 눈에 비늘을 뒤집어쓰고 살아온 셈이었지만, 사울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받은 시험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멋있게 뛰어내려라.” “천하만국 권세를 다 줄 테니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한 마디로 현세주의자로 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오직 세상에 보이는 것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처럼 현세에 시선이 고정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두었기에 이 유혹을 말씀으로 이깁니다. 마찬가지로 비전의 사람도 주님처럼 비늘 벗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비늘을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벗겨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을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믿으십니까? 그 분이 내 눈의 비늘을 능히 제거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나요?
세 번째로 ‘성전의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성전을 건축물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움직이는 성전(portable temple)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산 것입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은 움직이는 성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세 번째 장에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사인 내가 자신을 성전으로 일구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면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비양심의 세계에서 양심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지만, 성전 되지 못한 모습으로 목회의 현장에 나간다면 끔찍한 비극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살게 해 달라고….
네 번째 장에서는 ‘비전의 사람’이 되기 위해 유념해야 할 다섯 가지 사항을 설명합니다.
1) 현장의 중요성: 하나님의 비전은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책상이나 기도 속에서 비전을 얻은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다가 하나님의 비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2) 지닌 것의 소중함: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는, 오늘은 곧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삽니다.
3) 자기 세계의 확장: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간다고 합니다.
4) 이성적 신앙: 하나님의 비전은 이성적 신앙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결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보고픈 유혹에서 자유하는 자입니다. 크리스천은 영원을 사는 사람이기에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결과를 우리 생애에 못 볼 수도 있지만, 영원 속에서 주님과 함께 반드시 확인한다는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결론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하면서 정리하겠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에, ‘나가노 마끼’라는 젊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안수를 받은 목사님은 미신이 판을 치는 ‘가나사와’라는 곳에 텐트를 치고 개척 교회를 시작했는데, 성도가 한 명도 생기지 않아 낙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5년 동안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내와 아이, 예배 참석자는 가족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이 한 명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감격을 해서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청년이 갑자기 “욱” 하더니 핏덩이를 토했습니다. 폐병 환자였습니다. 당시 폐결핵은 고칠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님은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쫓아낼까?’ 그런데 그 순간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니야, 이 청년은 주님이 5년 만에 나에게 보내 주신 영혼인데…’ 나가노 목사님은 행주를 가져와서 청년이 토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을 차린 뒤 청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 청년은 유명한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출생이 어두웠기에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고, 청년 때 복음을 접해서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폐결핵이 발견되어 강제 휴학되었고, 교회에서도 출석을 거부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다가 ‘나가노’ 목사님의 소문을 우연히 듣고, 목사님마저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면, 세상을 버리기로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님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계속 그 청년을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청년이 폐병에서 완치되었습니다.
그 후 이 청년은 신학교에 복학해서 목사가 되었고, 수많은 빈민들을 위해 살게 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몇 끼씩 굶은 빈민들은, 장(腸)에 남아 있던 변이 차돌처럼 딱딱해져서 배변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 청년 목사님은 그런 빈민들의 항문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후벼서 뚫었습니다. 너무 심해서 손으로 안 되는 사람에게는 항문에 자기 입을 대고, 그 딱딱한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고? 그 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배운 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토해 낸 폐결핵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해 주신 사랑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분은 2차 대전 때 전쟁을 반대하다가 헌병대에 끌려갔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인 최초로 한국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고,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 살면서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를 크리스천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2차 대전이 끝날 때 무서운 학살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생을 목사와 사회 운동가로 사신 그 분의 이름은 ‘가가와 도요히코, 하천풍언’ 목사님입니다.
나가노 목사님의 핏덩이를 닦아주는 사랑이 없었다면, 하천풍언 목사님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하천풍언 목사님의 빈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2차 대전 후 일본인들은 중국인에 의해서 비참하게 학살을 당했을 겁니다. 나가노 목사님은 세상의 논리로 보면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5년 동안 한 명을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사랑과 하나님의 비전은 어두웠던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세상의 논리로는 부족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네 속에 있는 비전(Vision)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다.” 이러한 인정을 받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누가 뭐라고 평가해도, 하나님만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이 훈 목사.
이훈 목사(분당 만나교회 부목사) lhl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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